■ "왜곡된 서민금융 균형 필요… 한국형 마이크로 크레딧 수출"
글로벌 금융위기로 가장 분주해진 곳은 역시 금융당국이다. 구멍 난 시스템을 복원하랴, 다시 올지도 모를 위기를 대비하랴, 달라진 국내외 금융환경에 맞춰 새 틀도 짜랴…. 금융당국의 행보 하나하나는 그래서 더욱 관심을 끈다.
금융당국의 수장, 진동수 금융위원장을 서울 여의도 집무실에서 만났다. 과로 탓인지 심한 감기를 앓고 있었지만 현안에 대해 설명하는 목소리에는 자신감과 힘이 넘쳤다.
-요즘 들어 '서민'이 금융의 화두처럼 된 것 같습니다. 정부도 서민지원이나 서민금융 활성화 방안을 계속 내놓고 있는데요. 저소득 서민층을 위한 배려는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정부가 그 쪽으로 너무 몰아 부치는 것은 아닌가요. 좀 '정치적'이란 느낌도 듭니다.
"서민금융은 우리만 하는 게 아닙니다. 나라마다 형태는 다르지만 비슷한 분야가 선진국에도 다 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지금 대부업이 이렇게 커질 줄 누가 예상했습니까. 시장규모가 무려 10조원에 이릅니다. 분명 수요가 있다는 얘기예요. 언제부턴가 제도권 금융이 제공하는 서민금융은 줄고 다른 쪽만 비대해진 상황에, 다시 균형을 맞춰보자는 게 요즘 당국이 추진하는 서민금융 활성화의 배경입니다."
-서민금융의 대표작이라 하면 역시 미소금융을 들 수 있을 텐데요.
"금융위기 후 우선 시급했던 것이 일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일자리를 잃은 저소득층이 가장 어려웠지요. 뭔가 일을 해보려 하지만 자금이 부족한 이들을 위해 시작한 것이 미소금융입니다. 여기서는 돈을 빌리고 갚는 금융원리 못지 않게 자활 여부가 중요합니다. 단순히 빌려주는 게 목적은 아닙니다."
-그래도 대출기준이 너무 높다고들 불평이 많습니다.
"서민들에겐 사업 밑천 말고도 의료ㆍ생활비 같은 긴급 자금수요가 많습니다. 이런 대출이 제도권에서 잘 해결되지 않으니 초기에 미소금융으로 몰린 것이지요. 사실 미소금융 같은 대출은 그냥 퍼주기가 아니기 때문에, 성격상 초기에는 부진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더디더라도 제대로 된 성공 스토리를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대출기준 완화는 어렵다는 뜻인가요.
"미소금융은 이제 시작한 지 4달 됐습니다. 앞으로 3개월, 6개월 단위로 평가해 보고 여론도 들어보면서 보완책을 마련하겠습니다. 우선 미소금융 창구를 찾는 서민들에게 다른 서민대출을 상담ㆍ주선해 주는 '원스톱 서비스'를 이번 달 안에 시작할 생각입니다."
-미소금융 수혜대상이 어차피 제한적이라면 다른 보완책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실 당장 하루하루가 힘든 서민들에게 사업자금만 필요한 건 아닐 텐데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최근 발표한 서민 대상 보증부 대출입니다. 미소금융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작년부터 준비해 왔습니다. 사실 서민 금융사들이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등에만 열중한 데는 서민대출을 할 경우 돈을 떼일 염려가 컸기 때문입니다. 신용평가가 잘 안됐던 거고 단기간에 능력을 키우기도 어려웠던 겁니다. 그래서 제도적으로 보증을 이용하자는 겁니다. 금융사들이 신용부담은 조금만 지게 하고 나머지는 보증으로 해결하자는 것이죠. 만약 100%를 보증하면 금리는 더 낮출 수 있지만 그러면 서민금융사들의 수익이 나질 않습니다. 고민 끝에 보증재원을 정부와 서민금융회사가 반반씩 부담하게 했고 금리는 대략 20% 아래에서 자율로 정하게 했습니다."
-미소금융이나 보증부 대출 등이 '서민ㆍ실용'을 외치는 현 정권에서만 반짝 할 거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속가능한 제도가 될 수 있냐는 얘긴데요.
"장기간 왜곡돼 온 서민금융의 물길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거라고 봐 주셨으면 합니다. 10여년간 해 온 민간 중심의 '마이크로 크레딧' 사업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과 은행들이 출연해 하는 모델, 미소금융재단이 하는 모델을 더한 것입니다. 한번 잘 보세요. 기업, 은행들은 돈만 내는 게 아니라 자기 브랜드를 걸고 다양한 창업교육 아이디어까지 내고 있습니다. 지역별 안배도 하고요. 이건 획기적이고, 새로운 방식입니다. 어찌 보면 '한국형 마이크로 크레딧 모델'이라 할 수 있는데 잘만 육성하면 국제적으로 수출할 수 있는 모델도 되리라고 봅니다. 최근 세계은행(IBRD)에서도 주의 깊게 보고 있습니다."
-대부업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최근 상한금리를 인하(49%→44%)했는데요. 워낙 고금리를 받는 곳이니까 금리인하가 정서적으로 좋기는 한데, 하지만 이렇게 정부에서 금리를 누르면 결과적으로 음성 사채시장을 더 키우게 되는 건 아닐까요.
"우려가 없지는 않습니다. 불법 사금융 단속은 강화하겠지만 원천적 근절은 굉장히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보완책으로 보증부 대출을 만들어 대부업 수요를 흡수하고자 하는 겁니다. 법령 개정을 거쳐 상품을 내 놓을 때쯤이면 대대적인 홍보도 할 겁니다. 가능하면 당초 일정보다 앞당겨 조속히 시행하려 합니다."
-대부업계를 휩쓸고 있는 일본계 대형업체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현행법 테두리 안에서 영업하는 데 일본계라는 이유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 국내 업체들이 이에 맞설 경쟁력을 길러야 합니다. 일본계 업체는 저금리로 들여오는 조달상 이점도 있지만 앞선 신용평가 시스템으로 장사를 잘하는 측면도 큽니다. 그 동안 일본계만 급성장했다는 건 그만큼 우리 서민금융 회사들이 장사를 잘 못했다는 얘깁니다. 100개가 넘는 저축은행과 수많은 신협, 마을금고가 그런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안주하니까 못하는 거죠."
-금융위기도 대략 끝났고, 이제 금융권 '새판 짜기'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특히 하반기 은행권에선 '메가뱅크(Mega bank)'가 핫 이슈인데요.
"국내 은행들이 국제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규모가 필요하겠지만 꼭 사이즈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금융위기 전후 급성장한 스페인의 산탄데르 은행도 규모를 배경으로 성공한 게 아닙니다. 지금 삼성이나 현대차 같은 기업을 보세요. 커서 경쟁력이 생긴 건가요. 아닙니다. 사업을 잘 해서 커진 것이지요."
-그럼 메가뱅크에 반대하시는 건가요.
"정부가 반대하고 찬성하고 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정부가 메가뱅크를 만들려고 해도 시장에서 그대로 되는 것도 아니지요. 더구나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국제적으로도 대형화에 대한 부정적 분위기가 높습니다. 어쨌든 실익적 측면에서 볼 때도 정부가 나서서 '대형화'를 외칠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간다면 그렇게 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은행마다 나름의 국제적 경쟁력을 기르는 것이 먼저라고 봅니다."
-정부 소유인 우리금융지주가 민영화를 앞두고 있습니다. 정부가 어떤 민영화 플랜을 짜느냐에 따라, 다시 말해 우리금융지주가 누구와 짝짓기를 하느냐에 따라 메가뱅크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을 텐데요. 그렇다면 결국 메가뱅크도 정부의중에 달린 게 아닌가요.
"정부가 민영화의 구체적 밑그림을 짜서 접근한다는 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우리금융은 공적자금을 투입해 정부가 임시로 10여년 간 갖고 있던 겁니다. 우선 공적자금 회수를 극대화하고, 한편으론 우리금융을 빨리 시장에 돌려줘 은행산업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게 정부의 큰 목표입니다. 어떤 형태로 귀결될 지는 현재 진행중인 공적자금관리위원회의 논의와 시장에서의 수요에 달린 것이구요. 방향을 정할 6월까지는 이런 목표에 맞춰 어떤 대안이 있는 지 충분히 논의하고자 합니다."
-은행원들의 임금이 너무 높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제가 은행장을 해봐서도 알지만 소득수준이나 영업이익 창출능력 등을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객관적으로 국내 은행들의 하위직 임금이 높은 게 사실입니다. 성과급 비중이 큰 투자은행(IB)이나 트레이딩 파트 얘기가 아니라 상업은행(CB)을 말하는 겁니다. 은행장들에게 물어보세요. 신규채용은 계속 해야 하는데 어디서 수익을 내 지금 구조를 계속 끌고 가겠습니까. 다들 공감합니다. 그렇다고 정부가 강제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은행경영진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방법을 찾아야겠지요. "
-미분양 주택이 쌓이면서 건설업계에선 LTV(담보인정비율) DTI(총부채상환비율) 규제를 완화해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주택시장 침체는 기본적으로 수급을 무시했던 건설사에 1차 책임이 있습니다. 자구노력이 우선돼야지 경제 시스템에 위험이 될 수 있는 LTVㆍDTI를 조정하는 건 신중해야 합니다. 서울지역 평균 DTI도 현재 규제수준인 50%보다 훨씬 낮은 23%에 그치고 있어 완화의 효과도 크지 않습니다. 급증한 주택담보대출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필요성도 있는 만큼, 현재로서는 규제완화를 검토하고 있지 않습니다."
-끝으로 나라밖 얘기 좀 해보겠습니다. 요즘 미국이나 G20등에서 금융규제 논의가 한창입니다. 우리나라에 영향은 없을까요.
"국제 사회의 금융규제 논의는 크게 은행들의 자본규제와 대형 금융사들의 시스템 리스크 차단이 큰 줄기인데, 각국의 입장이 다르지만 올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서 중요한 가닥이 잡힐 것으로 봅니다. 신흥국과 선진국의 중간자 입장인 개최국(의장국) 한국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 진동수 금융위원장 약력>
▦1949년 전북 고창 출생 ▦경복고 서울대 법대 미국 보스턴대 경제학 석사 ▦행정고시 17회(1975년) ▦재정경제원 산업자금담당관 ▦정보통신부 체신금융국장 ▦대통령 금융비서관 ▦금융감독위원회 상임위원 ▦세계은행 대리이사 ▦재정경제부 국제업무정책관 ▦23대 조달청장 ▦재정경제부 2차관 ▦한국수출입은행장 ▦금융위원장
정리=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인터뷰= 이성철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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