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전두환정권의 유화정책은 80년대 후반 들어 탄압정책으로 바뀌었다. 전두환정권의 7년 임기가 끝나는 1988년을 맞으면서 전두환정권의 입장에서는 집권연장의 길을 모색해야 했고 민주세력의 입장에서는 군사독재정권을 끝장내고 민주정부를 세워야 했다. 그래서 민주세력은 반독재민주화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했고, 전두환정권은 유화정책을 포기하고 탄압정책을 강구하게 됐다. 구류가 구속으로 바뀌면서 서울미문화원농성사건, 구로연대파업사건 등에서 수십명씩 구속되었거니와 그해 11월 학생들의 민정당 중앙연수원 점거사건에서는 191명이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재야민주세력에 대해서도 전에 없던 탄압강풍이 몰아쳤는데 민청련의 상임위원장 김병곤이 구속되었고, 뒤이어 민청련 의장을 갓 퇴임한 김근태도 구속되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김근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살인적인 고문을 당하고서 고문수사관의 이름과 고문의 일시를 기억하고 있다가 이를 폭로했는데, 이것은 김근태의 탁월성을 말해주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살인적 고문을 당했으나 의례껏 당하는 걸로 치부하고 그냥 넘기는 게 통례였으니까. 오랜 관행과 정치사회적 분위기 탓도 있으나 올바른 태도는 아니었다.
결국 김근태의 고문 폭로를 계기로 고문에 대한 우리사회의 분노와 경각심이 공감대를 이루어 고문을 규탄하는 투쟁이 도처에서 일어났고, 특히 재야민주세력과 야당정치권이 공조하여 '고문용공조작저지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게 됐는데 이것은 재야민주세력과 야당정치권이 민주화투쟁에서 공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무튼 앞에서 언급한 대로 88년 정권교체기를 앞두고 민주세력으로서는 군사독재정권을 끝장내기 위한 대중투쟁을 전개해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대중성 있는 기치가 필요했다. 그 기치로 대통령직선제를 내걸었는데, 전두환정권이 들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체육관선거를 통해 집권을 연장하려 할 것이기에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하는 대통령직선제를 내거는 게 가장 대중적 설득력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표현양식을 두고 민통련과 민청련이 달랐다. 민청련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표방했고 민통련은 '민주헌법쟁취'를 표방했다. 민통련의 민주헌법쟁취는 내 견해가 반영된 건데, 개헌의 권한이 국회 내지 야당에 있는 터에 재야민주세력이 개헌을 주장해서는 대통령직선제를 관철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야민주세력으로선 대중투쟁을 통해 전두환정권으로 하여금 대통령직선제를 수용하도록 압박했어야 했다. 군사독재의 성격상 대통령직선제의 관철 여부는 대중투쟁에 의해 결판날 일이지 야당의 개헌 노력에 의해 결판날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을 이끈 국민운동본부도 그 명칭을 민통련의 방침대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로 했는데, 이것은 운동의 승리를 위해 잘한 일이었다.
민통련은 1985년 11월 문익환의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민주헌법쟁취위원회를 결성하여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하기 위한 본격적인 투쟁을 시작했다.
그런데 제1야당이었던 신민당이 개헌현판식을 전국적으로 개최했는데, 이것이 민통련의 민주헌법쟁취 투쟁에 큰 도움이 됐다. 1986년 2월 흥사단 강당에서 개최된 서울현판식은 국민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했으나 3월 20일경 부산에서 개최된 부산현판식은 약 2만명의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서면일대에서 시위까지 벌여 신민당개헌현판식이 예사롭지 않게 진행될 것을 예고했다. 이때부터 민통련은 이 집회를 최대한 활용할 방침을 세워 3월 30일에 개최될 광주현판식부터는 많은 역량을 투입키로 했다.
광주대회에는 30만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군사독재의 종식을 바라는 국민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가를 보여주었다. 민통련은 이 대회가 끝난 후의 가두행진을 사실상 주도했는데, 이것은 광주에 전청련(전남민주청연연합)을 중심으로 뛰어난 청년운동가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주대회는 '3.30대회'로 불릴 만큼 뜻깊은 대회였는데, 나는 이 대회를 보고 앞으로 연이어 개최될 신민당개헌현판식을 활용해 전두환정권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4월 5일의 대구대회, 4월 18일의 대전대회, 4월 26일의 청주대회에도 적극 대응하되, 특히 5월 3일 인천에서 개최될 인천대회에 총력을 집중하여 10만명 이상의 군중을 동원해서 서울로 진격해올 생각을 했다.
5.3인천대회는 민주세력과 전두환정권과의 대회전이었던 바,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상술키로 하고 여기서는 민통련이 신민당의 각 지역 개헌현판식을 성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 간략히 밝혀두고자 한다.
민통련에는 지운협 곧 지역운동협의회라는 기구가 있었는데, 이 기구는 이름 그대로 지역운동단체들의 협의체였다. 신민당 개헌현판식을 성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은 것은 이 지운협 소속 단체들이 연대하여 힘을 모았기 때문이었는데, 이처럼 지운협이 잘 가동될 수 있은 것은 기본적으로 각 지역의 운동역량이 강화된 때문이지만 특히 탁월한 청년운동가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 이름들을 일일이 밝히지 못해 아쉬우나 그 가운데 광주의 신영일이 특출했다. 그는 전남민주청년연합의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청년운동가로 광주의 3.30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끈 주역이었고, 다른 지역의 개헌현판식 때도 남다른 역할을 했으며, 특히 5.3인천대회에서는 수배 중이었는데도 5m도 넘는 나무 위에 올라가 연설하는 열정을 나타내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일찍이 지역운동론을 정립하여 지역운동이 서울에서 독립하여 지역적 독자성을 갖고 발전토록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재사박명인지 그는 1988년 단식투쟁의 후유증과 과로로 숨졌는데 그가 살아 있다면 운동권도 정치도 오늘처럼 쇠락하거나 망국적인 지역주의에 매몰돼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고매한 인품과 더불어 탁월한 능력이 더욱더 그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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