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의 일대 사건으로서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까지 무려 7년이나 이어진 장기전쟁으로 문학사에 끼친 영향도 두드러진다. 이 시대의 문인 실학자로 지봉 이수광(芝峰李晬光,1563-1628)은 이 전쟁 체험과 시대적 반성의 기틀을 《지봉유설》20권으로 정리하면서, 백과전서적 내용 가운데도 세계의 지리와 지도에 두드러진 관심을 보인 사람이다.
그 가운데 임진란 포로로 일본 무역선의 서기가 되어 안남(安南,베트남) 등 해외로 활약했던 조완벽(趙完璧)의 사적은 이 책에서는 <이문(異聞)> 조에 전했다. <조완벽전> 이라고 한 이 글에서는 완벽이 약관에 정유재란을 만나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고, 장사하는 왜인의 서기가 되어 세 번이나 안남에 다녀 온 뒤에 고국에 돌아와 탈 없이 살았다고 전했다. 이 밖에 조완벽의 말이라 하여, 일본과 안남의 여러 이상한 이야기를 소개하여, 임진란 이후에 한국문학에서 지리개념과 세계인식이 확대된 모습을 두루 전한다. 이 조완벽의 전기는 이지항(李志恒)의 《표주록(漂舟錄)》에도 전하고, 이보다 자세한 <조완벽전> 이 안정복(安鼎福)의 《목천현지(木川縣志)》에도 실려 전한다. 특히 안정복의 글에서는 조완벽이 안남의 총대감 문리후 정초(文理侯鄭勦)의 환대를 받아 알게 된 사실로, 안남에서 이수광의 한시집은 없는 집이 없을 만큼 널리 읽히는 문학 교과서였다고 했다. 지봉은 일찍이 진위사(鎭慰使)로 명나라 북경에 갔던 1597년, 안남의 연행사(燕行使) 풍극관(馮克寬)과 숙소인 옥하관(玉河館)에서 50여 일간 함께 머물며 사귄 바 있었고, 이때의 창수시(唱酬詩)가 두 나라에 회자(膾炙)되고, 특히 안남에서 지봉의 명성을 높였다. 조완벽전> 조완벽전> 이문(異聞)>
두 사람의 옥하관 창수는 그보다 2 세기가 지난 1790년(정조 14) 열하(熱河)에서 조선 연행 부사(副使) 서호수(徐浩修)와 월남 이부상서 반휘익(潘輝益) 사이에 "천고의 기이한 만남[千古奇遇]"으로 반추(反芻)된 바 있었다(서호수;《연행기》제 2편). 이때 서호수가 조선의 지봉과 안남 사신의 창수시를 외웠고, 반휘익 또한 "지봉의 시는 운치가 순아(醇雅)하고, 풍극관의 시는 의장(意匠)이 굳세다"고 평하여 두 나라 문학 교류 200년의 역사를 재확인했다. <조완벽전> 은 이렇게 《지봉유설》을 통하여 조선과 월남의 문학의 교류사를 전한다. 조완벽전>
이 임란 전쟁에 장기[長崎] 노예시장에서는 포르트갈 상인들에게 팔려 나간 조선 포로의 수가 적지 않았다 하며, 조선 소년 다섯 명을 사서 인도의 고아까지 데리고 가 풀어 주었다는 피렌체 상인 까르레티의 증언(《동방견문록》)도 전한다. 그 가운데 안토니오 꼬레아는 로마에 이르러 신부가 되었다고 하며, 이 소년을 모델로 그렸다는 루벤스의 <한복을 입은 소년> 은 또 다른 <조완벽전> 일 터이다. <조완벽전> 은 <한국사전(傳)> 으로 방송된 바 있지만, 작고한 소설가 한무숙(韓戊淑) 선생이 소설 작업으로 나에게도 의견을 물으시던 미완의 <조완벽전> 은 일본의 조선병합 100년을 뼈아프게 되돌아보는 한일관계사의 한 단면이며, 또한 한국으로 시집오는 수많은 월남 아가씨의 애환이기도 할 터이다. 조완벽전> 한국사전(傳)> 조완벽전> 조완벽전> 한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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