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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구열 넘치는 '상인대학'/ "전통시장 살리자" 상인들은 열공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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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구열 넘치는 '상인대학'/ "전통시장 살리자" 상인들은 열공 중

입력
2010.04.23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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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포에 정말 손님이 안 들어온다고 생각될 때는 입구에 따뜻한 색의 물건을 놓아두세요. 여러분 중에 빨간 점퍼 입고 오신 사장님들 얼굴이 제 눈에 확 띄는 것과 똑 같은 이치에요." 참석한 상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14일 오전 경기 수원시 구매탄시장 내 시장번영회 지하 사무실에서 40여명의 '학생'들이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다름 아닌 이 시장 상인들. 강의 주제는 '상품 디스플레이'.

학생들의 관심을 확인한 중소기업혁신전략연구원 신윤하 교수는 칠판에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상품진열 사진을 보여주며 차근차근 조언을 이어갔다. "물건은 적어도 허리 높이에 비스듬히 진열하고" "과일을 신선하게 보이려면 초록색 진열대를 쓰고" "할인문구는 빨간 잉크로 크게 적자" 등 백화점식 진열 노하우를 쏟아냈다.

한 상인이 "매일 바뀌는 물건 값은 과일박스 쭉 찢어 매직으로 적는 게 편하다"고 슬쩍 어깃장을 놓자, 신 교수는 "쉽게 썼다 지웠다 할 수 있는 칠판을 가격표로 쓰면 깔끔해져서 젊은 손님들의 발길이 한층 잦아진다"고 답했다.

상인들은 강의내용에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과일 담는 노란 비닐봉투를 허리춤에 매단 채 달려온 장길희(53)씨는 "장사하다 밥 한 숟가락 겨우 먹으면 피곤하기도 해 망설였는데, 막상 수업을 들으니 피부 속 깊이 파고드는 얘기들이라 좋았다"고 했다.

앞서 진행된 친절서비스, 의식혁신, 리더십 수업 등도 상인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됐다. 한 상인은 "예전에는 손님에게 '마수걸이도 하지 않았는데 만지작거린다'고 투덜대거나, 사지도 않고 가는 손님 뒤에 소금을 뿌리는 상인도 있었다"면서 "무심코 해온 행동들이 젊은 고객들의 발길을 끊게 했다는 사실을 배운 뒤로 시장 전체가 한결 친절해졌다"고 평했다.

배워야 변한다

장사라면 이골이 난 전통시장 상인들이 '상인대학'에서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다. 상인대학은 중소기업청과 시장경영진흥원이 2006년 전국의 전통시장 31곳에 마련한 교육과정이다.

물건 잘 파는 비법을 공짜로 가르친다는 소문을 타고 상인대학을 설치하려는 시장도 늘고 있다. 올해 설치한 곳만 100군데. 한참 장사할 낮에, 그것도 평균 10주라는 교육기간이 부담일 텐데도 지금껏 상인 1만 명이 수료증을 받았다.

장사에 관한 노하우를 수십년간 바닥부터 갈고 닦아온 베테랑 상인들이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까닭은 대형 유통업체의 힘에 눌려 갈수록 팍팍해지는 현실 탓이다. 실제로 서울에서만 최근 5년간 전통시장 50곳이 사라졌다. 구매탄시장 입구에서 식품가게를 운영하는 정두용(49)씨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 절박한 심정으로 상인대학에 신청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22년 전인 1988년 현재의 자리에 가게 흉내를 낸 천막 하나를 겨우 세워두고 생닭 도매를 시작했다. 부모의 월세 보증금을 받아서 시작한 가게이기도 했고, '나도 내 가게가 있다'는 자부심에 하루 2~3시간을 자는데도 힘든 줄 몰랐다. 덕분에 부자는 아니어도 끼니 걱정 없이 살아왔다. 하지만 90년대 후반부터 시나브로 가게가 기울었다. 경기침체, 임대료 상승, 대형마트와 백화점 등 넘어야 할 산이 갈수록 늘어났다. 두부로 업종을 전환해보고 시장 상인들이 힘을 합쳐 이벤트도 벌이면서 기신기신 손님들을 끌어 모았다.

지난해엔 또 다른 복병이 등장했다. 유명 대기업이 불과 두어 블록 떨어진 곳에 기업형슈퍼마켓(SSM)을 열겠다고 나선 것이다. 상인들의 거센 항의로 입점은 잠시 보류됐지만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그 사이 등록금을 고민하던 아들은 대학 2학년 진급을 포기하고 군입대를 지원했다.

뭉쳐야 산다

상인대학을 운영하면서 상인들간의 친목도 돈독해졌다. 2008년부터 상인대학을 운영중인 서울 관악구 관악신사시장은 올해 2기째 교육을 하고 있는데, 회원 40명의 동문회도 운영 중이다. 이들은 지역 어린이 그림 그리기 대회, 할인 이벤트 등도 추진하고 있다. 20년째 신발백화점을 운영 중인 박영란(47)씨는 "도시락 나눠주기 봉사활동도 하고 이벤트도 하면서 지역주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며 "당장 매출이 늘지는 않겠지만 길게 보고 힘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이 시장은 눈에 띄는 발전을 인정 받아 지난해 우수시장 박람회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법이나 정치가 전통시장을 지켜주면 좋겠지만, 거기 턱 받치고 앉아 마냥 기다리면 망한다는 걸 많이 겪었잖아요. 스스로 하나라도 더 배워서 우리 시장으로 손님들 마음을 끌어와야죠. 잘 될 거에요." 상인들의 표정은 밝았다.

김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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