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선 지음/팬덤북스 발행·267쪽·1만3,000원
조선에서 과거 급제는 유일한 출세 코스였다. 당연히 사람들의 삶은 과거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정구선 전 동국대 연구교수가 쓴 <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 는 과거 시험의 이모저모와 장원급제자들의 삶을 살펴보고 있다. 조선의>
과거 시험은 문과, 무과, 잡과로 나눠졌고 문과에 급제하는 것은 양반 관료사회에 진입하는 관문이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문과시험은 744회 실시돼 1만 4,620여명의 급제자가 나왔다. 장원급제자는 물론 744명이다. 1년에 1.4명 꼴로 장원급제자가 배출됐다.
장원급제자는 승진 등에서 특혜가 많았다. 판서급인 정2품 이상의 고관까지 승진한 이가 4분의 1 가량이었고, 3분의 1 이상은 차관급인 종2품의 참판을 지냈다. 조선의 관료는 70세가 정년이었는데, 장원급제자의 경우 정년을 늘려주기도 했다.
당연히 과거 급제를 위한 온갖 부정행위가 연출됐다. 남의 글을 베껴 쓰거나 다른 사람의 대리시험을 봐주는 차술차작(借述借作), 답안지를 바꿔서 제출하는 정권분답(呈券分遝), 시험장 바깥에서 답안을 미리 써 가지고 들어가는 외장서입(外場書入), 시험장을 경비하는 하급관리들이 드나들면서 응시자에게 답을 알려주는 이졸환면출입(吏卒換面出入)…. 부정행위를 가리키는 다양한 숙어가 당시의 풍속도를 짐작케 한다.
장원급제자 중에는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 현재의 오천원권 지폐 초상화의 주인공인 이 이, '사미인곡'으로 알려진 정철 등 역사책에 기록된 이들이 있다. 구한말 갑신정변의 주인공인 김옥균도 장원급제자였다.
최다 장원급제 기록을 가진 사람은 이 이. 그는 무려 9번에 걸쳐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는데, 누군가 그토록 벼슬에 집착한 이유를 묻자 "맛있는 음식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부모의 간절한 소망을 이뤄 드리기 위해서"라고 답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들의 삶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장원급제자가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내시의 조카라는 이유로 탄핵당한 신계종, 사관을 지내다가 세조실록 편찬 과정에서 사초를 고치는 바람에 관노로 전락한 민 수, 단종 복위를 기도했다가 희생당한 하위지 등을 통해 인생의 행로는 결코 시험성적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남경욱 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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