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레슬링의 최고 성적은 아시안게임 은메달 3개다. 이나래(55㎏), 강민정(72㎏)이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각각 은메달 1개를 획득했고, 김형주(48㎏)가 2006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시안게임에서 아직 금메달을 따지 못하고 있고 올림픽에서는 2004 아테네 대회 7위가 가장 좋은 기록이다. 세계 레슬링의 벽이 아직은 높지만 오는 11월 열리는 중국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여자레슬링의 사상 첫 금메달 도전에 나선 이들이 있다. 서울 중구청 소속인 엄지은(23ㆍ55㎏) 박상은(22ㆍ63㎏) 배미경(26ㆍ72㎏)이 그들이다. 지난 22일 양정모 올림픽 제패기념 제35회 KBS배 전국레슬링대회 겸 2010 국가대표 선발 제3차 포인트대회가 열린 전남 해남에서 이들을 만났다.
"'쫄쫄이' 유니폼, 그렇게 싫었는데"
지난달 경남 김해에서 열린 2차 포인트대회에서 나란히 우승한 엄지은과 배미경, 2차에 이어 이번 3차 대회에서도 우승한 박상은은 어떻게 레슬링에 입문했을까. 엄지은과 배미경은 유도를 하다 레슬링으로 전향한 경우다. 고3 때 레슬링복을 입은 엄지은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오빠(엄혁ㆍ수원시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는 "오빠의 권유로 레슬링으로 바꿨는데 잘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배미경은 "유도복을 입다 '쫄쫄이'를 입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처음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한다'고 했는데 대학 4학년 때 스스로 감독을 찾아가 레슬링을 하겠다고 마음을 바꿨다"고 말했다. "여자가 무슨 그런 험한 운동을 하느냐"는 부모의 반대를 무릎 쓰고 고1 때 레슬링을 시작한 박상은은 "당시도 마찬가지지만 선수층이 워낙 얇아 한 판만 이기면 동메달을 딸 수 있었고 대학(교대)에 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레슬링에 첫 발을 디딘 시기도, 사연도 제 각각이지만 이들은 어느덧 한국 여자 레슬링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2008년 국가대표에 뽑힌 엄지은은 전국체육대회 등 국내 대회 금메달을 휩쓴 뒤 지난해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갑작스런 갈비뼈 부상에도 동메달을 땄다. 배미경과 박상은은 올해 회장기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레슬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높기만 했던 세계 레슬링의 벽
세계 여자레슬링은 일본과 중국이 독식하다시피 할 정도로 2강 체제가 뚜렷하다. 외국 라이벌을 묻자 "너무 강해서…"라며 말꼬리를 흐릴 정도로 한국과 실력 차가 큰 게 사실. 엄지은은 "일본은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선수가 2명 있는데 세 살 때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집에도 매트가 깔려 있다는데 10년이 채 안된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라고 말했다. 박상은은 "2년 전만해도 '일본 선수의 다리 한 쪽이라도 잡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강했다"고 말했다. 이종호 중구청 레슬링 감독 겸 서울시레슬링협회 부회장은 "중국은 여자 선수만 1만 명인데 우리는 중고교생 다 합쳐봐야 200명 남짓"이라며 한숨 지었다.
하지만 한국이 조금씩 세계와의 격차를 줄여 나가자 견제도 받는다고 했다. 황영태 여자레슬링 국가대표 감독은 "일본이 세계 최강이니깐 한국팀의 전지훈련을 못 오게 하는 경우도 있다"며 "실력이 늘고 있는 한국을 견제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11월 여자레슬링 영웅 탄생, "지켜봐 주세요"
아직은 체력과 힘이 부친다는 박상은과 엄지은, 자신감이 부족해 정작 큰 대회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배미경. 각자의 단점을 잘 알기에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허리가 끊어질 듯한 태릉선수촌에서의 지옥 훈련도 견뎌낼 수밖에 없다. 가끔 소속팀 훈련 과정 중 남산에 있는 '죽음의 119계단'을 20바퀴 이상 돌다 보면 전날 먹은 음식물의 내용을 가끔 확인한다고 했다. 특히 레슬링의 훈장 같은 '뭉개진 귀' 등 20대 여성으로서 포기해야 하는 부분도 많은 이들이다.
2월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 혜성처럼 등장한 스피드스케이팅의 모태범, 이상화, 이승훈처럼 자신들도 11월 아시안게임에서 사상 첫 금메달을 따 내고 싶다는 소망도 밝혔다. "금메달을 따면 영웅이 돼요. 하지만 아직은 국가대표에 선발돼 아시안게임에 나가는 게 중요하죠. 2012 런던올림픽 출전이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지만 한국 사람들 특유의 집중력 아시죠. 한번 마음 먹으면 금방 따라 잡잖아요."
해남=글·사진 김종한 기자 tellm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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