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의 지하철 을지로3가역 주변을 지나다 보면 보도를 따라 길게 이어진 높직한 붉은색 담장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 지어지는 두산중공업 주상복합건물 공사장의 가림판이다. 수백m는 족히 됨직한 붉은 벽에는 낙타 소 염소 등의 동물모양이 짧은 설명과 함께 흰 색으로 부조돼 있어 자못 독특한 느낌을 자아낸다. 사실은 조각가 신현중의 <우제류를 위하여> 란 공공디자인 작품이다. 같은 이름이 붙여진 그의 조각작품들은 잠실 올림픽공원이나 광화문 흥국생명 사옥 등지에서도 볼 수 있다. 모두 다 건강한 생명의 약동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다. 우제류를>
■ 알다시피 숫자를 기수(奇數ㆍ홀수), 우수(偶數ㆍ짝수)로 나누듯 우제류(偶蹄類)는 발굽이 짝수로 갈라졌고, 기제류(奇蹄類)는 홀수인 포유동물이다. 소 돼지 사슴 양 염소 등이 전자에 속하고, 말 코뿔소가 후자에 속한다. 일찍이 시인 노천명이'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사슴)이라고 읊었듯 대부분의 우제류는 늘 포식자들의 위협에 쫓기는 약한 존재들이다. 달리기에 능한 골격구조에다, 돼지를 제외하고는 대개 반추동물인 것도 그 때문이다. 음식물을 얼른 삼키기만 한 뒤 재빨리 달아나 포식자 없는 안전한 곳에서 되새김질을 하기 위해서다.
■ 우제류에게만 걸리는 역병이 또다시 전국을 휩쓸고 있다. 입과 발굽 주변에 물집이 생긴다고 해서 구제역(口蹄疫)인데, 영어명칭도 Foot-and-mouth-disease다. 예전 소 아구창(牙口瘡)으로 불리던 그 병이다. 아기들의 입안에 생기는 소아 아구창이 곰팡이 때문인 데 비해, 구제역은 바이러스성이어서 이름만 유사할 뿐 발생기전은 다르다. 예방과 치료법도 없을뿐더러 왜 바이러스가 발굽의 모양을 구별해 침범하는지 이유도 분명치 않다. 다만 유전적으로 유사한 체질 때문으로 짐작할 뿐이다. 사족이지만, 진화분류학상 고래도 이들의 가까운 친척이다.
■ 그러므로 구제역 대책은 현재로선 죽이는 것밖에 없다. 말이 점잖아 살처분이지, 생매장이 보통이다. 이렇게 참혹한 죽음을 맞는 동물의 수가 한번에 보통 십만 단위다. 생태계에서 이토록 무차별적인 대량학살이 또 있을까? 구제역의 평균치사율이 50%에 크게 못 미치므로 절반 이상은 사실 억울한 죽음일 터이다. 정작 인간 스스로는 실낱 같은 가능성에도 생명에 대한 집착을 끊지 못하는 존재이면서. 더욱이 그 애꿎은 죽음의 대상이 태어나 그저 착하게만 살아온 크고 슬픈 눈망울의 우제류일진대, 이 또한 인간이 쌓는 업이 아닐는지….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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