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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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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입력
2010.04.22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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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중순 다시 침묵의 시간이 돌아왔다. 거리에 오가는 사람이 줄고 갑자기 적막이 찾아왔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우리 동네의 모든 학교가 중간고사 시험 기간에 돌입한 것이다. 아이들은 시험 공부를 하느라 집이나 학원에 박혀있기 때문에 한동안 친구와 어울리거나 밖에서 놀 수 없다. 부모는 아이들 공부 뒷바라지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지 감시하며 아이를 붙잡아놓고 직접 가르치기도 한다. 어른들마저 아이들 시험에 휩싸이니 동네가 한적할 수밖에 없다. 동네 가게들이 일시적인 불황기에 접어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가게 주인들은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으니 장사가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아이나 부모나 중간고사에 이렇게 매달리는 것은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다. 부모야 세상을 살면서 이기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뼈에 사무쳤을 것이다. 아이들은 미처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거듭된 시험을 통해 승리의 필요성에 차차 동의해 나가고 결국에는 어른 못지 않은 승리지상주의에 빠져든다. 그래서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을 때 좌절하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학생이 적지 않다.

1등에 대한 관심이 시험 때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 새 학년이 편성되면 교사, 학부모 심지어 학생들도 새 학급에 1등으로 배정된 학생이 누군지를 가장 궁금하게 여긴다. 학원을 다닐 때에도 1등과 함께 하기를 원한다. 학생이든 학부모든 우리 모두 '1등만 아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의 한선교 의원은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그는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에서 KBS의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표현이 찝찝하다면서 김인규 사장이 취임한 뒤에도 그 대사가 계속 나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개그 프로의 유행어 하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를 보며 일부에서는 한나라당이 집권한 대한민국을 '더러운 세상'이라고 풍자한 것에 대한 시정을 요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어찌 보면 그가 가볍게 한 지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발언과 달리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표현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를 곰곰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1등은 어느 사회에서나 주목 받고 많은 것을 갖는다. 1등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많은 것을 포기했을 것이니 인정은 해줘야 한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다. 어려서부터 극한의 경쟁에 내몰리고 그것을 진리로 알고 부모 역시 아이를 통해 자신의 경쟁력을 입증하려는 나라는 지구상에 거의 없다. 금융위기 등으로 이미 그 위력을 상실했거나 효용성이 의심받는 신자유주의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정치권과 언론이 그것을 부추기고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경쟁력과 관계 없이,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다 보니 다들 1등이 되고자 목을 맨다. 따라서 '개그콘서트'에서 술에 취해 과장되게 떠드는 것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은 한국 사회를 절묘하게 풍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행히 KBS는 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겠다고 한다. 표현을 문제 삼을 게 아니라 그것이 나타내는 한국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1등뿐 아니라 꼴찌까지도 받아들이려 다 함께 노력해야 한다.

박광희 생활과학부 전문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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