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을 얻기 전 로댕은 고독했다. 명성을 얻은 후 그는 더욱 더 고독해졌다." 파리로 찾아가 로댕의 비서로 일한 후 <로댕론> 을 썼던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처럼,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은 평생 고독한 창조자의 길을 걸었다. 이상화된 인간의 모습만을 표현해온 정형화된 조각의 틀을 깨고, 조각 속에 실제 인간의 표정과 감정을 불어넣어 장식품 취급을 받던 조각을 독립적인 예술의 분야로 끌어올렸다. 로댕론>
로댕에게도 긴 무명 시절이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지만,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세 번 내리 낙방했다. 이후 20여 년간 그는 각종 기념상이나 장식물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며 이름없는 조각가로 살았다.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1877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한 '청동시대'를 통해서다. 인체 표현이 너무나 생생했던 탓에, 살아있는 모델에 석고를 씌워 만들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일대 파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후 188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지옥문' 제작 의뢰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그는 수없이 많은 걸작을 창조해낸다. 그리고 인체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혁신적 시도는 매번 열띤 논란과 반향을 낳았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30일 개막하는 '신의 손_로댕'전은 '현대의 미켈란젤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 같은 화려한 수식어에 가려 정작 그 실체에 접근하기는 어려웠던 로댕의 예술에 직접 다가갈 수 있는 기회다. 국내에서는 그간 로댕 전시가 간헐적으로 열리긴 했지만, 대부분 소품 위주로 50~60점을 선보이는 데 그쳤다.
로댕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 152점을 포함한 180점의 작품을 우리 눈 앞에 펼쳐보이는 이번 전시는 국내 최초의 로댕 회고전이자, 최대 규모의 로댕 전시다. 또한 샤갈, 피카소, 모네, 반 고흐, 르누아르 등 그간 주로 회화에 집중됐던 블록버스터 전시가 입체 예술로 보폭을 넓혔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이번 전시의 수준은 파리 로댕미술관이 협력미술관으로 직접 참여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1916년 로댕이 자신의 전 작품과 컬렉션을 국가에 기증했을 때, 그가 머물던 비롱호텔에서 비롯된 로댕미술관은 로댕 예술의 보고다. 로댕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나딘느 레니가 이번 전시 기획을 맡았고, 프랑스 최고의 로댕 전문가들이 심층적 연구를 통해 도록에 글을 기고했다.
로댕미술관은 미술관 개관 이래 단 한번도 외부에 내보낸 적이 없는 '신의 손'을 비롯해 '생각하는 사람' '입맞춤' '영원한 우상' '발자크' '빅토르 위고'와 '지옥문' 축소물 등 핵심 작품들만을 골라 서울로 보낸다. 로댕의 대표작인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 흔히 보던 청동 작품이 아니라 로댕이 직접 손으로 빚어낸 채색 석고 작품이 온다. 이 역시 최초의 해외 반출이다. 12점까지 에디션이 가능한 청동 작품보다는 로댕의 숨결을 보다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석고와 대리석 작품을 집중적으로 선보이는 것도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전시는 연대기순이 아니라 주제별로 구성된다. '청동시대' '지옥문' '칼레의 시민' '사랑으로 빚은 조각' '로댕 작업실 엿보기' '춤, 생동하는 인체' '카미유 클로델' '1900년 로댕, 알마관 개인전' '공공기념물_발자크와 빅토르 위고'로 이어지는 9개의 섹션은 로댕의 작품 세계를 심층적으로 안내한다.
'신의 손_로댕'전 커미셔너 서순주씨는 "로댕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다양한 실체적 진실을 담으려 했던 작가"라며 "이번 전시를 통해 로댕이 왜 근대 조각의 시조이고, 혁명적인 작가인지를 미술사적으로 심도있게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180점의 작품들은 당초 19일 화물기 편으로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로인한 유럽 항공대란의 여파로 파리에서 발이 묶여 전시 관계자들의 마음을 졸이게 했다. 다행히 파리공항의 항공 운항이 재개되면서 23일 인천공항에 도착, 전시 준비에 들어갈 예정이다.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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