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로댕의 예술 세계는 '조각에서의 인상주의'로 평가된다. 인상주의가 회화를 사실적인 재현으로부터 해방시켜 현대 회화의 자유로운 세계로 향하게 했듯이, 로댕은 조각을 전통적인 조각의 원리인 기계적인 사실성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를 위해서 로댕은 조각에서 지켜온 몇 가지 원리들을 배제한다. 첫째, 완전한 인체나 흉상을 완성된 형태로 제시하려 한 전통적 조각과 달리 로댕은 신체의 일부분을, 그것도 거친 돌덩어리로 둘러싸인 채로 제시하고 있다. '신의 손'이나 '로댕의 손'처럼 손만을 다룬 일련의 작품들이 있고, '신들의 전령, 아이리스'에서처럼 목이 잘려 나간 형태의 인물상들이 완성된 작품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조각 작품이란 인물이나 신체의 모습을 수동적으로 모방하는 것이라기보다 작가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라는 로댕의 생각을 보여준 것이며, 이는 현대 조각의 자유로운 창조세계를 열어줬다.
둘째, 로댕은 표면을 거칠게 처리한 다듬어지지 않은 돌덩어리를 작품으로 내세워 매끄러운 표면 처리를 해야 한다는 조각의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거친 표면을 통해서 그는 예술가의 감정을 자유롭게 나타낸다는 표현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로댕은 조각이 대상을 모방해서 돌덩어리를 다듬어내는 것이 아니라, 돌 안에 잠재되어 있는 형태를 드러내는 것임을 보여주려 했기에 그의 작품은 미완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죽은 물체인 단순한 돌덩어리가 예술가의 손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는 생성의 과정이 바로 조각임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생명에 대한 이런 생각은 로댕의 작품 주제로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그는 미의 본질은 생명이며, 작품을 통해서 그 생명을 가장 고귀하게 나타내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상황에 따른 인간의 움직임을 나타낸 인간 형상에 의해서라고 생각했고, 다양한 형태의 인간 조각을 만들어 냈다.
'지옥문'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상이 그런 맥락의 의미를 갖는다. '지옥문'은 인간이 운명적으로 맞게 되는 소외, 절망, 죽음에 대한 고뇌의 표정을 다양한 인물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 그 중 특히 '생각하는 사람'은 단지 초상의 기능만을 했던 종전의 조각과는 달리 인물에 대한 조각적 해석을 통해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조각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로댕 조각의 현대적 특성으로 거론되는 세 번째는 조각 받침대의 장소적 기능을 사라지게 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사실주의 재현 조각은 작품이 놓인 장소나 용도와 관련됐을 때 의미를 지녔고, 그 기념비적 역할을 매개한 것이 조각의 받침대였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에 로댕의 '발자크' 상은 원래 의도한 장소에 놓이지 않고, 여러 나라 미술관에 그 복제품들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각 받침대도 이리저리 옮길 수 있는 것이 됐으며, 전통 조각의 장소에 따른 기념비적 성격도 상실됐다.
그 대신 작품 그 자체로 의미를 드러내고, 조각 자체의 재료성이나 구축 과정을 중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렇게 해서 로댕의 예술 세계는 조각의 자율성을 내세우는 현대 조각의 길로 향하는 첫 걸음이 되었다.
박일호ㆍ이화여대 조형예술대 교수
● 로댕 연보
▦1840년 11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하급 관리의 장남으로 출생
▦1854년 프티트 에콜(제국미술학교) 입학해 4년 간 수학
▦1857년 에콜 데 보자르(국립미술학교) 지원해 세 번 연속 불합격
▦1862~63년 누이 마리아의 사망으로 슬픔에 빠져 수련 수도사 생활
▦1864년 반려자 로즈 뵈레와 만남. 조각가 카리에 벨뢰즈의 아틀리에에 취직
▦1866년 뵈레와의 사이에서 아들 오귀스트 뵈레 출생
▦1870년 벨기에로 이주해 공공건물 장식작업으로 연명
▦1877년 파리로 돌아옴. '청동시대'로 논란 일으키며 유명세 얻음
▦1880년 프랑스 정부 의뢰로 '지옥문' 작업에 착수. '생각하는 사람' 등 제작
▦1883년 카미유 클로델과 만남
▦1886년 '입맞춤' 제작
▦1893년 클로델과 동거 청산. 파리 근교 뫼동으로 이주
▦1895년 '칼레의 시민' 제작
▦1898년 살롱전에 출품한 '발자크'상이 문인협회로부터 거부당함
▦1900년 파리 알마광장 전시관에서 대규모 개인전 개최
▦1908년 파리 비롱호텔 일부 임대해 생활
▦1910년 레지옹 도뇌르 2등 훈장 수훈
▦1916년 전 작품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 국회 로댕미술관 건립 결의
▦1917년 1월 29일 뫼동에서 뵈레와 결혼. 2월 14일 뵈레 사망
▦1917년 11월 17일 뫼동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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