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7살의 도로시 하이트는 미국 뉴욕 명문 바나드대 합격장을 받는다. 하지만 대학측은 흑인 학생에게 할당된 2명의 쿼터가 다 찼다는, 교칙에도 없는 관행을 들어 그의 입학을 거부한다. 버지니아주 리치몬드라는, 인종문제에 대해 고루하고 편협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그로서는 대학의 처사가 못 견딜 만큼 충격적이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이 흑인 인권운동의 대모, 나아가 미국 여권ㆍ시민권 운동의 거인의 이력이 언급될 때마다 이 일화는 어김없이 첫 머리에 언급되며 명문 바나드의 낯을 붉히게 했다.
뉴욕대를 거쳐 뉴욕시 복지국 사회복지사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 그는 25살에 흑인여성전국회의(National Council of Nigro WomenㆍNCNW)와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이어진 70여 년의 생애 동안 그는 미국 시민권운동 역사상 어느 지도자보다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투쟁의 현장을 누빈다. 50,60년대 마틴 루터 킹 목사 등과 함께 시민운동의 최전선에서 활약했고, 57년부터 85세로 은퇴한 97년까지 무려 40년간 회장으로서 NCNW를 이끌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부터 빌 클린턴까지 미국의 모든 대통령이 그에게 고문 역할을 청했고, 다양한 정부 위원회에서 정책 자문을 수행했다. 2004년, 바나드대는 그에게 명예졸업장을 바쳤다.
생일을 하루 앞둔 지난 3월 25일, 워싱턴D.C의 하워드 대학병원에 입원하던 순간까지 그는 일했고, 낸시 오바마는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시들지 않는 열정의 그를 자신의 롤모델이라며 추앙했다. 그가 20일 타계했다. 향년 98세.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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