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의 신라는 '비석의 시대'였다. 당시 신라는 우경(牛耕)을 통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기반으로 중앙통치체제를 갖추었고 율령 반포, 불교 공인, 영토 확장 등으로 나날이 성장하는 국가였다. 신라 사람들은 그 왕성한 기운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영토 곳곳에 문자를 돌에 새긴 비석을 세웠다. 그 이전 시대에는 문자의 사용이 활발하지 않았고, 이후 통일신라 시기에 들어서게 되면 문자를 종이에 기록하는 것으로 넘어가게 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고고관 신라실에서 20일 개막, 6월20일까지 개최하는 테마전 '6세기 신라를 보는 열쇠_문자'는 금석문 자료와 고고 유물에 쓰여진 문자를 통해 신라의 발전을 조명하는 전시다.
전시에는 1934년 경주에서 발견된 후 처음으로 서울 나들이를 하는 '임신서기석'(보물 제1141호)을 비롯해 명문(銘文)이 있는 비석과 목간, 토기 등 30여 점이 전시된다.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쓴다. 하늘 앞에 맹세하노라.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성의 도를 확실히 잡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기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얻게 될 것이다… 시(詩) 상서(尙書) 예기(禮記) 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익히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 한다." 학자에 따라 제작연도를 552년 또는 612년으로 보는 '임신서기석'은 두 화랑의 맹세를 기록한 글로 널리 알려져있다.
진흥왕 때 한강 유역으로의 신라 영토 확장을 보여주는 '북한산진흥왕순수비'(국보 제3호), 지방관을 파견해 주민들을 성 쌓기 작업에 동원하는 모습이 기록된 '남산신성비' 제2비와 제9비,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명활산성비' 등도 전시에서 볼 수 있다.
또 지난해 5월 발견된 국내 최고(最古)의 신라비인 '포항 중성리비'(501년 제작 추정)와 '영일 냉수리비'(503년 제작 추정)의 복제품, '영천 청제비'의 초기 탁본, 함안 성산산성 출도 목간의 복제품 등도 전시된다.
'포항 중성리비'와 '영일 냉수리비'에는 신라 정부가 지방 주민을 율령으로 통치하는 내용이 나타나있다. 최성애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 학예연구사는 "신라의 5세기가 금관 등 고분의 황금유물의 시대라면 6세기는 비석이 많아지는 것이 특징"이라며 "이는 신라 사회가 율령반포 등으로 그 이전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돌에 글을 새겨 세상에 보이다'와 '넓어진 영토에 기념비를 세우다', '체계적으로 지방을 다스리다', '각지로 퍼져가는 신라문화' 등의 주제로 구성됐다. 전시 제목은 6세기지만, 전시 유물은 삼국유사에서 '중고(中古)'(법흥왕~진덕여왕)라고 지칭한 6~7세기의 유물을 포괄하고 있다.
남경욱 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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