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서로 사랑하세요'라고 말씀하기 시작한 때가 1980년대 중반, 그러니까 내가 필화 사건으로 모진 고문을 당했을 즈음입니다. 그러니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었죠. 용서할 수 없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나, 가해자가 사과조차 하지 않는데 어찌 용서를 할 수 있나…. 그때부터 추기경 말씀이 제 평생의 화두가 된 셈입니다."
소설가 한수산(64)씨가 장편 <용서를 위하여> (해냄 발행)를 펴내고 20일 서울 정동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나가사키에서 피폭 당한 한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전5권의 장편소설 <까마귀> (2003) 이후, 한씨가 소설로는 7년 만에 발표하는 작품이다. 까마귀> 용서를>
"소설로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실을 취사선택했을 뿐 허구로 지어낸 부분은 없다"는 한씨의 설명처럼 <용서를 위하여> 는 순수하게 그의 자전적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제5공화국 초기였던 1981년 이른바 '한수산 필화 사건'에 연루돼 치욕적인 고문을 당했던 그의 경험이 자세히 묘사됐다. 용서를>
당시 한씨는 한 일간지에 연재하던 장편 '욕망의 거리'에서 국가 원수를 모독하고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내용을 담았다는 이유로, 고 박정만 시인 등과 함께 서빙고 보안분실에 끌려가 일주일 간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한씨는 이후 1987년 한 월간지에 필화 사건 이야기를 쓴 적이 있을 뿐, 이번처럼 본격적으로 다룬 적은 없었다. "육체란 불가사의했다. 몇 번을 그렇게 쓰러졌다가 일으켜 세워지는 일이 반복되는 동안, 첫 번째의 폭력이 몸을 으스러뜨리듯 지나가고 나면 그 다음부터의 폭력에는 거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100쪽)
한씨가 이처럼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번 소설엔 두 가지 이야기 축이 있다. 하나는 필화 사건 이후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절망에 시달리던 주인공이 뒤늦게 가톨릭에 귀의, 자기를 치유해가는 과정이다. 또 한 축은 주인공이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추기경이 어린 시절을 보낸 경북 군위, 유학했던 일본 조치대학, 사목을 시작한 안동 등지를 답사하며 고인의 생애를 좇는 과정이다.
소설은 김 추기경을 종교적 위인이기에 앞서 육친의 가족들을 사랑하고 가난한 신자들과 부대끼며 행복해한, 풍부한 감성을 지닌 한 인간으로 묘사한다. 주인공은 추기경의 인간애와, 자신에게 세례를 주고 평생 나환자와 함께했던 고 이경재 신부의 생애 등에 감화돼 차츰 필화 사건과 고문으로 인한 마음의 응어리를 푼다. "저는 잊으렵니다. 용서하지는 못하더라도 잊으려고 합니다. 제가 살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285쪽)
한씨는 "이제 마음을 추스를 때가 됐다고 생각하던 참에, 필화 사건 때 함께 감금됐던 인사로부터 '이제 우리가 겪었던 일을 글로 정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김수환 추기경의 소박하고도 인간적인 아름다움이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한 인간의 황폐함을 어떻게 구원했는지를 소설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1972년 등단, 장편 <부초> <해빙기의 아침> , 단편집 <4월의 끝>을 비롯해 80권이 넘는 소설과 에세이 등을 발표하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한씨는 "이제 '인기 작가' '감성의 작가'라는 기존의 나에 대한 수식구 대신, 넉넉한 인생의 지혜를 발휘하는 '노작가'로 불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김대건에 이은 한국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에 관한 소설과, 격동의 현대사를 헤쳐온 한 여자의 일생을 다룬 소설을 올해 안에 출간하려 한다"고 말했다. 해빙기의> 부초>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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