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트(knit)는 본디 한 땀 한 땀 뜨개질을 해 만든 옷이다. 씨줄과 날줄이 한치의 오차 없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각자 역할을 맡은 실이 상대를 업신여기면 누더기가 된다. 니트 덕에 연을 맺어 서로의 씨줄과 날줄이 된 이들이 있다. 육신의 장애는 만남의 장애가 될 수 없었다. 한 사람은 잘 들리지 않고, 한 사람은 잘 보이지 않지만 둘은 같은 길을 걷기에 불편하지 않다. 씨줄 권도연(55)씨와 날줄 정연희(33)씨의 인연을 각자의 독백을 통해 들어봤다. 편견을 버리면 어떤 삶이 펼쳐지는지 우리에게 실증한다.
날줄 정연희(33)씨
두 살 때 고열을 앓은 뒤 청각을 거의 잃었다. 얼굴을 맞대고 상대의 입 모양을 살펴야 겨우 알아듣는다. 부모는 딸의 치료와 학업을 위해 모든 걸 접고 충남 홍성군을 떠나 서울로 왔다. 그 뒤 청각장애 특수학교인 애화학교(서울 강북구 미아3동)에 다녔다.
꿈은 들리지 않아도 꿀 수 있었다. 장애인에게 응당 요구하는 단순반복 작업은 싫었다. 그건 편견이었다. 새롭게 무언가 만들거나 그리는 일을 찾았다. 청각을 잃은 대신 시각과 촉각은 남보다 나았다. 그래, 디자인을 하자. 애화학교를 졸업한 뒤 패션직업전문학교에 다녔다.
2002년 무렵 얻은 첫 직장은 기성복 제작판매업체였다. 잡일 틈틈이 디자인 공부를 했다. 2005년 대한민국 패션대상 장려상을 탔다. 부상으로 서유럽 국가를 돌아볼 기회가 생겼는데, 파리에서 실 한 가닥, 한 가닥이 어울려 독창적인 무늬를 만드는 니트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밤 10시까지 근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소재부터 봉제는 물론이고 패턴까지 섭렵해야 하는 니트를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또 다른 도전이 필요했다. 사표를 내고 대학 주변에서 직접 디자인한 니트를 팔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실력을 더 쌓아야 했다.
2008년 한양여대 니트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 맨 앞자리에 앉아 한 토씨라도 놓칠 새라 교수의 입 모양을 따라 빠짐없이 받아 적고,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의 노트를 보고 들리지 않아 놓친 내용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취업은 커다란 장벽이었다. 수상경험도, 관련업체 경력도, 열심히 공부한 보람도 장애 앞에선 무기력했다. 서너 군데 면접을 봤지만 포트폴리오를 보고 칭찬하던 면접관들은 청각장애 얘기만 꺼내면 표정이 달라졌다. 어떤 곳은 원서를 넣어도 연락조차 없었다.
하긴 애화학교 졸업자 중에 패션디자인을 하는 이는 거의 없다. 반도체공정에서 단순조립을 하거나 웹 디자인을 하거나 장애학생을 가르치는 정도가 성공한 축에 낀다. 여기까지 오기도 쉽지 않았는데, 나의 도전은 무모한 것이었을까? 후회가 밀려올 무렵 기회가 왔다. 몸의 장애 대신 마음의 열정을 본 사람이었다. 그와 더불어 입는 사람의 몸에 딱 맞아떨어져 "편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니트를 만들고 싶다.
씨줄 권도연(55) 사빈니트 사장
사실 모험이었다. 한양여대 담당교수가 "나이가 많고 착실한데 취직이 잘 안 되는 학생"이라고 추천을 할 때만 해도 심드렁했다. 패션업계는 고객이 어떤 옷을 원하는지 섬세하게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997년 사업을 시작한 뒤로 관련업체에서 청각장애인을 고용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연희의 니트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내 안에 앙금처럼 가라앉은 편견을 치워버렸다. 나도 모르게 "더 상처받지 말고 그냥 나한테 와라"고 해버렸다. 그렇게 올해 2월 식구가 됐다.
연희는 전화는 물론이고 사소한 응대도 할 수 없다. 사소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직원(10여명)들을 모아놓고 "연희는 디자인을 주로 할 거니, 다른 일은 시키지 마라"고 미리 일러뒀다. 처음엔 걱정했지만 연희가 워낙 밝아서 직원들과 잘 어울린다. 손님들도 연희의 장애를 알게 되면 오히려 맑게 웃는 모습이 좋다고 한다.
나도 도움을 많이 받는다. 마흔 즈음부터 진행된 노안(老眼) 탓에 작업용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바늘을 찾을 수도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연희처럼은 아니지만 나도 장애를 안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 함께 니트를 디자인하고 싶다. 이곳이 연희의 마지막 회사이기를 바란다.
장애인을 처음으로 고용하면서 그전엔 몰랐던 우리나라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얼마나 형식적인지도 깨달았다. 대학 실습생도 나라에서 50%를 지원해주는데, 장애인은 정규직원으로 고용해도 두 명 이상이 돼야 지원이 가능하단다. 더구나 준비해야 하는 서류는 얼마나 복잡하고 까다로운지.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는 거 같아 안타깝다.
'편견, 부끄러움의 또 다른 이름'
19일 서울 중구 신당동의 사빈니트 매장엔 크레파스 통을 연상시키듯 각양각색의 니트가 정연하게 줄지어 걸려있었다. 그 중엔 정연희씨가 디자인한 작품도 있다. 권 사장이 일러주기 전엔 어떤 것인지 가늠할 수 없다. 그들이 만든 옷만큼은 편견의 벽에서 자유로운 셈이다. 4월 20일은 제30회 장애인의 날이다. 올해 주제는 '편견, 부끄러움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이다.
고찬유 기자
이수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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