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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42> 다시 시작된 집필과 강연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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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42> 다시 시작된 집필과 강연 활동

입력
2010.04.19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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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부에서도 일을 했고 한국은행에서도 일을 했지만 주된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대학교수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교수직 25년 한국은행 19년 정부 2년이라는 햇수로도 그렇고 내 적성에 맞는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상아탑에 묻혀 연구에만 전념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교수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얻은 지식을 사회현실에 구현해야 한다는 욕구가 강했다. 더구나 나의 전공이 경제발전론이어서 나의 경제지식을 한국경제 발전에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교수로서 각종 언론 매체에 기고하고 기업이나 각종 사회단체에서 강연하는 등을 통해 사회참여를 많이 하게 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내가 89년 7월 약 2년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 하고 대학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이러한 기고와 강연 등 참여활동은 다시 활발하게 이어졌다. 내가 공직경험을 갖게 되어서인지 외부의 요청은 그 전보다 더 많아졌다. 한국경제 매일경제 서울경제 중앙경제 등 경제신문과 한국 동아 조선 중앙 등 거의 모든 신문에 많이 기고했으며 고정칼럼을 쓰기도 했다. 이들 신문의 창간기념일이나 새해 원단의 특집논단을 맡아 쓰기도 했다. 방송과 월간지에도 자주 나가 우리 경제에 관해 논했다. 국방부와 계룡대 각 군사령부와 경찰청 그리고 지방자치단체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경제관련 강의를 했다. 지금 되돌아보니 경제전문인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경제의 산업화를 이끌어 가는데 미력이지만 참여했다는 자긍심을 느낀다.

나의 신문기고 가운데는 독자로부터 빗발친 항의를 받은 글도 있었다. 98년에 정부는 기름을 절약하고 도시 교통난 완화를 위해 차량부제를 전국적으로 확대실시 한다는 방침을 밝혔는데 나는 98년 7월14일자 한국일보에 '차 부제 보다 기름 값을 더 올리자'는 칼럼을 쓴 일이 있다. 그 때 나의 주장은 차 부제를 하게 되면 한가한 사람이 차를 굴리고 차를 꼭 써야 할 사람은 차를 못 쓰는 비효율이 있고, 여유 있는 사람은 번호가 다른 차를 더 사게 되고 위반차량을 단속하는데도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 부제는 올림픽 때처럼 단기간일 때만 적용해야 한다고 썼다.

그런데 이 글이 나가고 한국일보 데스크에 빗발치는 항의가 들어왔다. 주로 택시기사와 자영업자 등 서민들의 항의였는데 돈 있는 사람만 차를 굴리라는 것이냐, 택시는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어느 대학원생으로부터의 반론도 있었다. 이렇게 민감한 반응을 나는 전연 예기치 못했다. 나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맞다 하더라도 시민들이 느끼는 감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 날 이 문제를 풀어서 재론하는 글을 내보낸 일이 있다.

2002년 3월 4일자 한국경제 신문에 '음력설을 없애자'는 글을 쓴 일이 있는데 이때도 신문사에 항의가 쇄도했으며 특히 그 글에는 내 e메일 주소가 있어 이곳으로도 항의가 빗발쳤다. 음력설은 내가 건설부 장관으로 있던 때인 89년에 김용갑 총무처 장관이 "보통사람의 시대"를 뒷받침한다는 취지에서 주도하여 부활시킨 것인데 이로 인한 2중 과세의 폐해를 생각할 때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양력과세를 하고 있다. 주로 설날 고향에 가고 싶어 하는 근로자들이 내 글에 대해 항의를 했는데 항의를 듣고 보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는 달리 나의 글이 정부의 정책수행에 도움을 준 사례도 적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93년 6월 나는 중앙경제신문에 '경제개혁 이렇게 하자'는 제하에 9회에 걸쳐 금융실명제, 기업구조조정, 노동개혁, 교육개혁, 정부개혁, 토지주택 등등 경제전반에 대한 건의 형식의 칼럼을 연재한 일이 있는데 관련문제의 정책을 입안할 때 그 글이 참고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일이 김대중 정부 하에서도 있었다. 나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98년 2월25일부터 한국경제신문에 '새 정부 경제정책 이렇게'라는 제하에 거시정책·금융개혁·기업개혁·노동개혁·정부개혁·국토와 주택·교육개혁 등등에 관해 10회에 걸쳐 칼럼을 연재한 일이 있다. 그런데 집권초기 정책의 큰 틀을 짜면서 이 연재물의 내용을 참고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97년 말 IMF 외환위기가 터지고 나서 다음해인 98년 한국경제는 연리 25%에 이르는 고금리와 달러당 2.000원에 근접하는 고환율로 인해 기업들이 고사위기에 몰리고 흑자도산도 줄을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나는 98년 6월 16일자 한국일보에 '인플레 정책을 써라'는 칼럼을 썼다. 나의 주장은 물가가 오르더라도 금리를 내리고 돈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물가보다도 불황이 더 큰 문제라는 점, 우선 흑자도산을 막아야 한다는 점, 돈을 풀어도 불황 때문에 인플레효과는 크지 않다는 점, 설사 물가가 오르더라도 기업부채를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는 점 등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 진념 당시 기획예산위원장 등이 참석한 경제장관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이 글의 뜻이 무엇이냐고 각료들에게 묻고 그 정책방향에 대해 토의했다는 것이다. 그 해 가을부터 정부는 금리를 내리고 돈을 푸는 금융완화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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