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쫓겨난 조선인들 달동네… 일본인 살았던 번화가… 지금도 경계선 남아
"목포의 낯은 보기에 참 애처로웁다. 남편으로는 늘비한 일인의 긔와집이오 동북으로는 수림 중에 서양인의 집과 남녀학교와 예배당이 솟아 있는 외에 땅에 붙은 초가뿐이다… 유달산 밑을 보자. 집은 돌 틈에 구멍만 빤히 뚫러진 도야지막 같은 초막들이 산을 덮어 완전한 빈민굴이다."
목포에서 나고 자란 소설가 박화성(1904~1988)은 1925년 데뷔작 <추석전야(秋夕前夜)> 에서 목포를 이렇게 묘사했다. 서울의 경우에도 충무로와 명동 등 남촌에는 일본인이, 북촌에는 조선인이 사는 등 식민지 조선 대부분의 도시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삶의 터전이 분리돼 있었다. 추석전야(秋夕前夜)>
그러나 1897년 개항한 근대 도시 목포는 그 정도가 특히 심했다. 일본인은 개항 직후 목포에 마련한 '각국공동거류지'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1910년 한일 강제병합 후에는 총독부 토지조사국이 시가지 조사를 한 뒤 도로를 축설하고 도시계획을 세워 시가지를 조성했다. 그곳이 지금의 목포시 만호동이다.
반면 조선인은 유달산 기슭의 무덤 150여 기를 이장한 터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가뜩이나 바위와 늪지대로 덮인 고장인 목포에서, 살 만한 땅은 모두 일본인이 차지한 탓이었다. 현재의 행정구획 상으로 죽교동, 대성동인 조선인 마을은 처음부터 경계도 없이 빈 터만 있으면 움막을 지었다.
1925년 3월 1일자 한 신문은 당시 조선인 마을의 상황을 "조금만 비가 오면 다닐 수가 없게 되며 수통이 적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십여 명의 사람이 물을 길으려고 둘러서게 된다"면서 "일본인의 화장터가 옆에 있어 날마다 송장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어린아이들의 눈앞으로 시체를 실어나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일 강제병합이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성을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목포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일인의 긔와집'이 즐비했다던 만호동에는 지금도 낙후된 일본식 2층 건물이 곳곳에 눈에 띈다. 당시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양품점, 자전거점, 모자점 등을 열어 번화가를 형성했다. 현재 목포 구 시가지에 해당하는 이곳에는 당시의 건물들이 여전히 식당 등 다양한 점포로 활용되고 있다. 일자로 뻗은 반듯한 길도 그때 그대로다.
그러나 조선인 마을이 있던 온금동은 아직도 다닥다닥 붙어선 작은 집들이 달동네를 형성하고 있다. 앞 집 대문을 거쳐야 자기 집 대문에 다다를 수 있는 집들. 틈만 나면 비집고 움막을 세웠던 일제강점기 때는 이렇게 공동 대문을 사용하는 집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여전히 애창되는 전 국민의 망향가로 1930년대에 크게 유행한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도 이같은 조선인 마을인 양동에서 태어났다. 고석규 목포대 총장(역사학)은 저서 <근대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 (2004)에서 "'목포의 눈물'은 일제시대 유행하던 신파 정서를 대표하는 대중가요"라며 "마음으로는 저항의식이 작용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외부의 힘에 눌려 체제에 순응해야 했던 조선인들에게 신파성은 필연이었다"고 설명했다. 신파조의 대중가요를 애절하게 불렀던 이난영의 음색은, 식민도시 목포라는 공간의 이중성이 낳은 산물이기도 하다. 근대도시>
이난영의 생가 터를 중심으로 여러 갈래로 난 골목길은 정돈된 일본인 마을의 그것과 극명하게 대비됐다. 미로와도 같은 이 길들은 몇 차례 정리된 지금도 두 명이 나란히 걷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비좁다.
목포는 일본 영사관과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근대식 건물이 잘 보존된 도시로 유명하다. 그렇게 역사적 사건과 연결된 공간 외에도 목포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생활상이 오롯이 묻어나는 타임캡슐 같은 도시이기도 하다. 가령 온금동에는 지금도 일본인이 운영하던 벽돌공장(해방 후의 조선내화) 건물들이 한 지대를 이루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 노동자들로 크게 붐볐던 곳이다. 이곳의 건물 윤곽과 나무로 만든 환풍기 틀, 돌로 만든 굴뚝 등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다.
하지만 이곳과 일부 달동네 등은 2012년 착공되는 '서산ㆍ온금지구 재정비 계획지역'로 지정돼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를 위기에 처해 있다. '근대 흔적을 보존한 도시'라는 목포에서 자칫 대중의 삶이 녹아든 현장이 지워진다는 말이다. "나는 여기서 나서 그런지 돈은 잘 모르겠고, 그대로 두는 게 좋소. 요 앞에 콘크리트 건물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경관이 참 좋았제. 집이 워낙에 멋있는데 바란 적도 없는 아파트는 왜 짓는다는 건지…." 재개발 구획에 속한 금화동 주민 김경자(56)씨의 말이다.
조상현 목포문화원 사무국장은 "일본의 한 인류학 교수는 목포 조선인 뗌뼈?골목길을 보고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며 "재산권이 있는 사유지라 하더라도 역사적 공간은 국가나 시가 나서서 지켜야 하지 않겠나"라고 반문했다.
김혜경 기자 thanks@hk.co.kr
■ 여학생이 술집 작부… 1930년대 호황 맞아 '유흥 도시'로
면화, 쌀, 소금 등 물산 집합의 중심지로서 상업의 요지가 된 목포는 1930년대에 발전의 절정을 맞았다. 외부 인구도 많이 유입돼 1930~35년 목포의 인구증가율은 무려 11.2%(서울 2.4%)로 전국 최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조선인의 희생을 담보로 이뤄진 목포의 발전에는 결코 밝은 면만 있지는 않았다.
"상업도시 목포에서 늘어가는 것은 음식점과 음주 청년과 '거리의 신사'뿐"(매일신보 1935년 9월 22일자)이라는 기록처럼, 목포의 상업적 발전은 유흥의 발전으로 그 수준이 평가될 만큼 퇴행적이었다. 시민 박신규(86)씨는 "지금의 신안군청 인근에 요정과 술집들이 워낙 많았다. 근처 사는 사람들은 가정집을 요정으로 착각하고 들어오는 취객들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금화동 12번지 일대에는 유곽으로 쓰이던 일본식 건물들이 지금도 일부 남아 있다.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인도 드나들던 대표적인 홍등가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1935년 한 해 유객 수는 조선인이 3,848명, 일본인이 6,876명이었다.
하지만 1인당 지출 비용은 조선인 9.6원에 일본인 10.1원으로 거의 차이가 없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부의 차이를 고려할 때 조선인의 유흥비 지출은 분명 지나친 수준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당시 고무공장 숙련공의 하루 일당은 20전, 쌀 반 되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반면 미래의 밑거름이 될 교육에 대한 인식 수준은 낮았다. 당시 높은 수업료와 낮은 여권 의식으로 목포여중에 진학하는 조선인은 매년 10명 남짓이었는데, 술집 중에는 이 학교의 조선인 재학생이 작부로 일하는 곳도 있었다.
시사잡지 '호남평론' 1936년 7월호에는 한 여선생이 아동교육 좌담회에서 "어머이가 매일 밤에 집안을 비우고 외출을 하기 때문에 자녀 교육이 낭패된다"고 지적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고석규 목포대 총장은 "목포의 타락적 향락은 경제적 파산뿐 아니라 지식의 파산을 가져옴으로써 목포보통고등학교 설립운동 실패의 결정적 요인이 됐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식민지 도시가 실향성과 비인간적 사회의 전형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조선인의 타락은 억압적 상황 속에서 절망과 체념이 낳은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목포= 김혜경기자
■ "일제 잔재와 흔적 구분해서 청산해야"
목포는 1897년 10월 1일 고종의 칙령으로 개항된 도시이다. 일본과의 조약을 통해 개항을 강요당한 부산이나 원산, 인천과 달리 목포는 국왕의 칙령으로 개항됐다.
부산의 경우 개항된 지 7년이 지나서야 항구의 세관인 해관이 문을 열었지만 목포는 개항 전에 이미 사무를 관장하는 감리서와 해관이 설치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준비된 개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04년 일본인들이 목포 앞바다의 섬 고하도에서 목화 시험 재배에 성공하면서 목포는 일본의 우리 농산물 수탈의 전초기지가 되어갔다.
일제강점기에 목포는 '1흑(김) 3백(쌀, 면화, 소금)'의 대형 항구도시였다. 일본인들에게는 낙원이었으나, 한국인들은 노예와 같은 생활을 강요당했던 눈물의 도시였다. 필자도 초등학교 때 식량 증산을 위해 운동장에 들것으로 흙을 날라다 밭을 만들고, 퇴비를 만들 풀을 베러 다녀야 했다. 배급받은 콩깻묵을 끓여 먹은 뒤 설사로 고생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목포에는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많다. 소방도로를 내면서 약간 끊기기는 했으나 미로 같은 골목길이 그대로 남아 있고, 일본인 거류지에도 그들의 흔적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일제의 '흔적'과 '잔재'를 혼동해 종종 실수를 하는 것 같다. 목포의 구 일본영사관(국가사적 제289호) 뒤에 있던 봉안전 철거가 대표적인 예다.
일본 왕과 왕비의 사진을 모셔놓고 조선인에게 참배를 강요했던 이 건물은 1996년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사라졌다. 2년 뒤 목포를 방문한 일본 학자들이 봉안전이 없어진 것을 보고 "여러분들이 일본의 역사 왜곡을 방조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반문했을 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한 신문기자가 유달산에 있는 일본 승려 홍법대사의 석상을 보고 일제의 잔재이니 부숴야 마땅하다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그런다고 역사가 바로 서는 것일까. 오히려 이런 역사의 흔적은 잘 보존하여 반면교사로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불쾌하다고 해서 역사의 흔적을 깨부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없애야 할 일제 잔재는 따로 있다. '부락' '사시미 한 사라' '와리바시' 등 흔히 쓰이고 있는 일본말이 그것이다. 청산할 것은 잔재이지 흔적이 아니다.
김정섭 목포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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