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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31> 사림정치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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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31> 사림정치의 틀

입력
2010.04.19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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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를 사대부정치시대라 한다면 16세기는 사림의 여론정치시대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귀족이 정치주체가 되는 귀족정치시대였다. 따라서 모든 권한이 재상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권력과 부가 귀족들에게 집중되어 대토지소유가 유행하고, 양민이 노비화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귀족들이 산천을 경계로 국토를 분할점령하고, 이러한 토지에는 특권적으로 세금을 면제해 주었기 때문에 국가재정이 고갈되어 나라가 망한 것이다.

따라서 새로 건국된 조선은 이러한 귀족들의 특권을 축소시키기 위해 재상의 인사권을 제한하고 이·병조 전랑(銓郞: 정랑과 좌랑)의 당하관(堂下官) 추천권과 3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언론권을 강화했다. 그리고 전랑의 후임 추천권도 확보했다. 그러나 이러한 권한은 저절로 획득된 것이 아니라 사림의 투쟁에 의해 얻어진 것이다.

조선의 집권사대부들은 그들의 우익을 강화하기 위해 고려부터 양반관품이나 관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사족으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향리로 격하시켰다. 그리하여 조선초기에는 많은 지방 사족들이 과거시험을 거쳐 중앙정계로 진출했다. 이들을 사림파라 한다. 사림파는 수양대군의 계유정란(癸酉靖亂)이후 8차례에 걸친 공신책봉으로 형성된 훈구파와 대립하게 된다. 이 사림파와 훈구파의 충돌이 4대사화이다.

그러나 사림의 정계진출은 역사적인 대세였다. 사화로 몇 사람의 사림을 죽이거나 귀양보낸다고 이들의 진출을 저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훈구파는 날이 갈수록 늙어가고 명분에서도 사림파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했다. 사림파는 도학(道學)으로 무장해 기득권층인 훈구파의 비리를 공격하고 훈구파에게 밀린 국왕이 사림파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훈구파 중에서도 사림파에 동정적인 전향사림파가 늘어가게 되었다. 그 결과 선조조부터 사림정치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사림파는 지금의 시민단체와 유사하다.

사림파가 만든 사림정치의 틀은 이렇다. 공경(公卿)은 전랑을 임명하고, 전랑은 3사 관원을 추천하며, 3사는 언론을 통해 공경의 잘못을 공격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경국대전> 에도 없는 관행(慣行)이었다. 서로 맞물려 협력과 견제를 하게 되어 있었다. 이 결과 전랑권을 둘러싼 당쟁이 치열해지게 되었다. 왕권이나 재상권은 견제되고 사림의 재량권은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의 재량권이 과도하게 늘어나 당쟁이 치열해져서 나라가 망하게 될 지경에 이르자 사림정치의 틀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영·정조시대에는 타협안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4색 당파를 고르게 등용하는 탕평정치가 대두하게 되었다. 그리고 1741년(영조 17)에 사림정치의 틀을 깨버렸다. 대신 탕평을 지지하는 왕의 외척들이 정권을 독차지하는 외척세도정치시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사림정치는 그나마 당파간의 협력과 견제가 가능했으나 외척세도정치는 외척이 정권을 독점해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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