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오후 영화 '시'(감독 이창동)의 홍보를 맡고 있는 A씨의 속은 바싹 타 들어가는 듯했다.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만이 살 길"이라며 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날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이 확정되자 그의 얼굴은 밝게 빛났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금세 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었다. 흥행 각축을 벌일 '하녀'(감독 임상수)가 동반 진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지난주 충무로는 온통 칸영화제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식사자리에선 맛난 반찬이었고, 술자리에선 더할 나위 없는 안주였다. 떡 줄 사람은 이역만리 프랑스에 있는데 "'시'의 진출이 유력하다" "'하녀'는 리메이크라 쉽지 않다" "두 편 진출은 지나친 욕심" 등등 온갖 추측과 논거가 난무했다.
'시'와 '하녀'의 동반 진출에 충무로는 환호작약하고 있지만 정작 두 영화 관계자는 속을 끓이고 있다. 5월 13일 맞대결을 펼쳐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경쟁부문 진출이라는 흥행의 유리한 고지를 두 영화가 동시에 올랐기 때문이다.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한국영화끼리의 정면대결은 전례가 없다. 그만큼 사생결단의 절박함이 감지된다.
촬영에 들어갈 때부터 칸을 겨냥한 두 작품은 제작과 홍보 등 여러 일정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열한 레이스를 펼쳐왔다. 포스터 발표와 제작보고회를 하루 차이로 각각 단행했고, 예고편을 누가 극장에 먼저 내보내냐를 두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개봉일 눈치를 서로 보다 결국 칸영화제(5월12~23일)가 한창 열릴 때 함께 관객과 만나게 됐다. 출혈경쟁이 불가피하지만 칸영화제만한 흥행 호재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경쟁부문 진출작 발표 전 "떨어지면 흥행은 끝장"('시' 홍보 관계자) "탈락은 아예 생각지도 않는다"('하녀' 홍보 관계자)며 배수진의 자세를 보이기까지 했다.
칸영화제를 등에 업은 두 영화의 경쟁이 너무나도 뜨거워서일까. 당초 13일 개봉하려던 김주혁 류승범 주연의 충무로 기대작 '방자전'(감독 김대우)은 6월로 발을 빼며 훗날을 기약했다. '시'와 '하녀'의 '칸 쟁투'는 23일 수상작이 발표될 때까지 지속될 듯하다.
'시'와 '하녀'는 여러모로 마음이 끌리는 영화다. 칸영화제의 후광에 기대지 않아도 관객들을 유혹할 미덕과 매력과 개성을 갖췄을 것이다. 칸영화제의 위상이 해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지만 칸에만 매달리는 '모 아니면 도'식 마케팅 경쟁이 아찔하다. 칸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외화는 애써 멀리하면서도 유독 칸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한국영화엔 집착하는 국내 관객의 심리는 더욱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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