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재 신음하는 '스탄 50國' 풍부한 자원의 저주인가
“대통령 아들에게 경제권력이 몰려있고, 부패지수는 세계 189위이다, 정부는 일반국민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모른다.”(로자 오툰바예바 키르기스스탄 사회민주당 당수ㆍ현 과도정부 수반)
“시골 어디를 가도 비참하다. 빵, 버터, 설탕 조금으로 생활한다. 그런데 대통령 친인척들의 재산은 9억7,000만 달러(약 1조원)라고 한다”(카자흐스탄 모 정유업체 중역 탈가트 깔쿠조프씨)
지난해 말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서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 응한 위 두 사람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독재 상황을 생생히 들려줬다. 이런 상황이 이달 키르기스의 ‘제2의 튤립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중앙아의 심각한 독재국가들이 다시금 전세계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20년 가까이 집권, 종신제 도입도 잇따라
중앙아시아 5개국은 1991년부터 구 소련에서 차례로 독립한 이후 대통령이 선거에 의해 바뀐 적이 없다. 카자흐와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은 19년째, 타지키스탄은 16년째 집권하고 있다. 초대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투르크메니스탄과 2차례 혁명이 발생한 키르기스만이 대통령이 바뀌었다.
종신제까지 도입되고 있다. 투르크는 2006년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전 대통령이 종신 대통령이었고, 카자흐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2007년 종신 집권을 위한 헌법 개정안에 서명했다. 우즈벡의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은 개헌으로 집권을 2014년까지 늘렸고, 타지크의 에모말리 라흐모노프 대통령도 2020년까지 집권기한을 연장했다.
풍부한 천연자원이 오히려 저주?
유일하게 두 차례 독재정권을 뒤엎은 키르기스는 주변국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바로 내세울 만한 천연자원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때문에 중앙아 국가들 중에 가장 가난하게 머물러 있지만, 그만큼 기득권 세력의 기반이 약해 오히려 혁명 가능성이 높았다고 볼 수도 있다.
다른 국가들은 풍부한 자원으로 어느 정도 경제성장을 이루며, 동시에 권력층의 부패와 치부도 공고해졌다. 카자흐의 석유 매장량은 공식 세계 7위(실제는 2위라는 분석도 있음)이며, 우라늄 매장량은 세계 2위이다. 우즈벡은 금 매장량이 세계 3위로 추정되며, 투르크는 가스매장량이 세계 3위이다. 또 타지크는 세계 최대 알루미늄 생산국가이다.
이런 축복의 천연자원으로 인한 수익은 거의가 대통령의 아들ㆍ딸ㆍ사위ㆍ형제 등 친인척들에게 돌아간다. 카자흐에 진출한 한 국내기업 관계자는 “채굴권 계약서 한 장을 흔들면서 기업들에게 뇌물을 받고, 자원개발 이익분배금을 호주머니로 챙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말단 공무원들까지 갖가지 트집을 잡아 뇌물을 챙기는 것이 일상이 됐다.
터질 듯한 불만, 그러나 구심점이 없어
깔쿠조프씨는 “지금 카자흐 대통령은 자신의 동상까지 만들기 시작했고, 자신을 예수에 비유하기도 한다”며 “모두들 ‘정신 나간 대통령’이라고 분노하지만, 공산주의를 거치면서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커 나서지 못한다”고 말했다.
실제 키르기스를 제외하면 야당기반이 거의 없다. 심지어 대통령 친인척이 야당 총수를 하면서, 여당을 지원하는 경우까지 있다. 때문에 선거를 치른다고 해도 현직 대통령이 80~90% 이상의 득표율로 재선되는 구조다. 깔쿠조프씨는 “아무도 선거결과를 믿지 않는다”며 “선거제도도 엉망이고, 조작되는 것은 뻔하다”고 말했다. 오툰바예바는 “대통령이 따로 지시할 필요도 없이 공무원들이 알아서 선거조작을 하는 게 중앙아시아의 현실”이라고 개탄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1990년대 초반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국가들의 혁명사는 단출하다.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이 모두 15년 내외의 독재를 경험했지만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성공한 사례는 키르기스의 ‘튤립혁명’이 유일하다. 부정선거의혹(2005년)과 과도한 물가인상(2010년 4월)에 격분한 키르기스의 야당과 시민이 정권을 전복시킨 두 차례의 튤립혁명이 현대 중앙아시아 혁명사의 사실상 전부인 셈이다.
그렇다고 키르기스를 제외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 한 차례도 혁명의 기운이 움트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실패로 마무리됐지만 2005년 5월 우즈베키스탄에선 ‘안디잔 사태’라 불리는 미완의 시민혁명 시도가 있었다. 당시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 1인 독재에 물렸던 이슬람 시민 세력이 야당과 합세해 우즈베키스탄 동부 도시인 안디잔에서 반정부 시위를 일으켰다. 하지만 카리모프 정부는 독재를 지키기 위해 무리하게 시위대를 향해 발포, 1,000여명이 사망하는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고 결국 혁명의 싹은 피워보지도 못한 채 잘렸다.
외신들은 두 차례나 혁명을 성공시킨 키르기스의 사례가 우즈벡과 같이 오랜 세월 독재를 참아가며 봉기의 에너지를 축적해온 인근 중앙아시아국가 민중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분석했다. 12일 뉴욕타임스는 한 칼럼에서 “중앙아시아 국가의 통치자들은 축출된 바키예프 키르기스 대통령과 비교했을 때 독재자라는 점, 그리고 부패한 지도자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며 “이들 국가 민중의 인내심이 언제 한계에 달할지 모르지만, 비슈케크(키르기스 수도)의 사례는 혁명이 중앙아시아 어느 곳에서라도 발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반면, 소비에트 연방에서 오랜 세월 강권통치를 경험한 중앙아시아 국민 대다수는 독재자에 대한 뿌리깊은 두려움에 젖어 있기 때문에 쉽게 시민혁명을 실천하지 못한다는 분석도 많다. 키르기스 혁명 성공사례가 중앙아시아에 이른바 ‘혁명 도미노’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하긴 아직 이르단 얘기이다. 영 일간 인디펜던트는 11일자에서 ‘과연 어떤 중앙아시아 국가가 키르기스의 뒤를 이을 것인가’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잠재적인 시민혁명 가능성을 짚었다. 하지만 신문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2006년 종신대통령 니야조프가 사망했을 때 큰 혼란 없이 그의 후계자가 정권을 이어받았다”고 지적하며 중앙아시아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쉽게 혁명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 내다봤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 중앙亞는 유라시아의 심장?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중심지. 중앙아시아를 '유라시아의 심장'이라 부르는 이유다. 그러나 그 이름만큼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사실이다. 지정학적으로만 중심이지 역사, 정치, 경제적으로 변방인 곳이 바로 중앙아시아다.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 '스탄'국가들이 처음 역사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90~1991년 소련 해체로 인해 독립할 때다. 과거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소련의 영향력을 벗어나 독립국의 지위를 가지면서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말이 독립이지 소련 대신 독립국가연합(CIS)이란 이름 아래 러시아에 의존하는 처지였다. 독립 이후에도 러시아의 '뒷마당' 정도로 인식됐다.
공산주의 붕괴는 이들 국가들에 경제체제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국민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소련으로부터 교육받은 정치 엘리트들의 독재는 이어졌다. 여러 민족이 혼합돼 있어 민족의 이름으로 뭉치기도 쉽지 않다. 그나마 석유와 천연가스 등 방대한 에너지 자원이 수중에 들어왔지만 모두 국가가 전담, 부패와 족벌정치로 연결됐다. 서방 선진국들도 이 국가들의 민주화보다 그들을 협상 파트너로 삼아 잇속을 차리는 것에 만족했다. AFP는 최근 "가장 권위적이고 부패한 곳이 바로 중앙아시아 국가"라고 보도했다.
중앙아시아의 지정학적 중요도는 2000년대 들어 강대국들 사이에서 몸살을 앓는 요인이 됐다. 2001년 9ㆍ11 테러로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위해 미국은 배후 기지가 필요했고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군사기지를 마련했다. 뒷마당에 미국이 들어오면서 위협을 느낀 러시아도 이들 국가에 압력을 행사하며 미국 견제에 혈안이 됐다. 키르기스 소요사태 발생 직후 친미 정권인 쿠르만벡 바키예프를 축출하기 위해 러시아가 소요를 야기했다는 '러시아 배후설'이 나온 것도, 친러 과도 정부가 들어서자 미국이 긴장한 이유도 강대국들간 '알력' 싸움으로 비쳤다.
여기에 자원을 확보하는 동시에 신장 위구르 접경의 안정을 바라는 중국이 이들 국가들에 경제협력을 확대하면서 중앙아시아는 미ㆍ중ㆍ러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이대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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