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 두려워 주춤거리던 제 양 어깨를 받쳐주던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18일 오전 백발이 성성한 노흥권(70)씨가 서울 대학로사거리 벤치에 앉아 한 곳을 응시했다. 시선은 마로니에공원에서 종로쪽 방향으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닿았다. 이내 눈을 감더니 상념에 젖어 들었고, 50년 전 그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1960년 4월 19일 오전 9시 당시 서울대 문리대(종로구 혜화동) 정문 앞. 서울대 3학년생(사학과 58학번)으로 문리대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노씨는 닫힌 교문만 노려보고 있었다. 교문 너머엔 사복경찰 수십 명과 정복경찰 약 80여명이 포진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잔뜩 얼어있었다. '4월 19일에 일제히 나가자'는 사발통문이 교내에 돌았지만 전날 고려대 학생들이 종로4가에서 정치깡패들에게 몰매를 맞았다는 얘기가 나돌았기 때문.
학생들이 서로 눈치를 보는 사이 노씨는 어느새 대열 맨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겁이 났지만 뒤로 물러서는 건 부끄럽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다"고 했다.
그때였다. 후배 김정강(정치학과 59학번)씨가 노씨의 오른쪽 어깨를 붙잡더니 "지금도 절대 잊혀지지 않는 얼굴"로 어깨동무를 했다. 곧이어 노씨의 왼쪽 어깨는 얼굴도 모르는 친구가 받쳐들었다. 닫힌 교문은 이영일(정치학과 59학번)씨와 학생 몇몇이 열었다. 노씨는 "'이제 됐어 나가자'란 생각이 퍼뜩 들었는데, 그 발걸음들이 4ㆍ19의 시발점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대열은 10분도 안돼 경찰 저지선에 막혔다. 50년 만에 노씨가 응시한, 옛 서울대 수의대 옆자리에서 무지막지한 곤봉세례를 당해야 했다. 선두에 선 노씨는 피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곤봉에 맞아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고, 머리를 감싸 쥔 손은 빨갛게 부었다"며 "하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씨 등 서울대 학생들에 대한 경찰의 폭행장면은 60년 5월 2일자 미국 <라이프(life)> 지에 실렸다. 경찰이 휘두르는 몽둥이를 베레모(학생모)를 쓴 노씨가 손으로 막기 직전 모습이 담겨있다. <라이프> 지는 당시 세계적으로 700만부가 발행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사진은 정지된 화면만을 담았지만 노씨는 이날 폭행에도 주눅들지 않고, 경찰을 피해 학교 안으로 들어간 뒤 빙 돌아 나와 종로4가에 모여있던 거대한 시위대와 합류했다. 그리고 옛 국회의사당(현 태평로 서울시의회)까지 전진했다. 라이프> 라이프(life)>
노씨는 외신에 자신의 모습이 실린 걸 알았지만 이제껏 누구한테 대놓고 자랑한 적이 없다. "그때만 해도 민주주의가 모두의 열망이었는데, 자칫 개인 무용담처럼 들릴 것 같아서"라고 했다. 그는 "지금은 나이가 들어 무서운 것도 있고 해야 될 거, 안 해야 될 것도 알지만 당시는 자유, 정의, 민주주의 등 옳은 것, 해야 될 것들로만 생각이 가득 찬, 정말 순수하고 열정적(인 청년)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무역회사 은행 외국계회사 등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다 2000년 은퇴했다. 국가보훈처는 19일 4ㆍ19혁명 50주년을 맞아 혁명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272명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한다. 노씨도 그 중 한 명이다.
노씨의 관심사는 상이 아니다. "정의감 하나로 폭력에 굴하지 않고 제 어깨를 붙잡아주고, 제 뒤를 받쳐준 친구들을 시상식장에서 만났으면 여한이 없겠어요." 18일 노씨와 친구들이 경찰에게 맞았던 대학로 거리는 휴일을 맞은 시민들의 웃음으로 가득했다.
김현우 기자 777hyunw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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