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신형철씨는 어떤 글에서 이장욱(42)씨를 가리켜 "뭐랄까, 그는 그냥 '문학'이다"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씨는 1994년 시인으로 등단해 두 권의 주목할 만한 시집을 냈고, 5년 전엔 장편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로 문학수첩작가상을 받으며 소설가가 됐다. 그뿐인가, 황병승 김행숙, 김민정 등 1970년대생 시인들의 낯선 화법을 "다른 서정"으로 옹호하며 시단에 '미래파' 논쟁을 일으킨 평론가이기도 하다. 칼로의>
그런 그가 2006년부터 최근까지 발표한 단편소설 8편을 묶어 첫 소설집 <고백의 제왕> (창비 발행)을 냈다. 독창적 서사, 세련된 화법을 갖춘 작품들이 이씨가 단편 쪽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이 작품집의 개성을 더하는 것은 수록작 대부분에 환상, 환각에 사로잡힌 인물 혹은 숫제 현실에 발붙이지 않은 유령들이 등장한다는 점. 이씨는 "일상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주변부적인 존재들, 또는 존재의 주변부를 통해 우리 삶이 더 잘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창작 의도를 밝혔다. 고백의>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등에 뽑힌 단편 '변희봉'은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배우와 조우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다. 부친의 투병, 이혼 등으로 내리막 인생을 사는 늦깎이 배우 지망생 만기는 평소 존경하는 배우 변희봉을 세 번 연달아 만난 일에 고무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물론, 인터넷 검색 결과조차 "변희봉이 대체 누구냐"는 반응을 내놓는다. 헛것에 사로잡혔다며 자신을 힐난하는 친구에게 만기는 부친이 죽으며 남긴 말을 전한다. "만기야… 니 밴… 히봉이라고… 아나?" 술집에서 나와 철거된 동대문운동장 앞을 지나가던 만기와 친구 앞에 어디선가 날아온 야구공이 툭 떨어진다.
견고해 보이던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이씨의 소설 속에서 이처럼 힘없이 허물어진다. 다른 단편'동경소설'에서 일본의 허름한 여관에 묵는 주인공 일행은 로비에서 어디론가 사라진 연인 유키와의 추억담을 주절대는 한국인 남자를 만난다. 그의 고백에 유키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이 추임새처럼 반복되자 일행은 남자가 애인을 죽였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의심은 남자의 고백이 진행될수록 불확실해지고 종국엔 유키가 과연 실존하는 인물인지조차 모호해진다.
이씨의 소설에서 이처럼 현실과 환상을 문턱 없이 넘나드는 존재는 3년 전 남편과 사별한 여자의 집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드나드는 도둑('밤을 잊는 그대에게'), 자살한 아내의 유령과 함께 파리의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을 찾아가는 남자('기차 방귀 카타콤') 등으로 변주된다. 흥미로운 것은 환상성 짙은 소설에 으레 내포되곤 하는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가 이씨의 소설에선 좀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인데, 이는 작가의 의도이기도 하다. "가령 우리 주변엔 혼자 중얼거리며 걸어가거나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많다. 이는 환상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엄연히 현실 자체의 풍경이고, 이를 소설로 표현하고자 했다."
듣는 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급기야 그들로 하여금 내면에 감춘 진실을 토로하게 하는 주인공의 고백을 다룬 표제작 '고백의 제왕'은 이씨 특유의 환상적 기법과 거리를 두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가장 인상적인 수록작 중 하나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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