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 한 대 출고까지… 165가지 평가에 1만3000시간 소요
'도요타 사태' 이후 산업 현장이 바뀌고 있다. 각 기업이 도요타의 대량 리콜을 보면서 안전하고 하자없는 품질을 확보하기 위한 생산 현장 구축과 재점검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단 한 건의 불량이 기업의 흥망을 좌우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며, 각 기업은 불량률 제로(0)'를 위한 다양한 방안과 시스템을 강구하고 있다.
실제로 삼성은 이건희 회장이 '위기론'을 내세우며 경영에 복귀한 가운데 이미 사장단회의를 통해 '절대품질'경영을 선언한 상태다. 현대ㆍ기아차는 정몽구 회장 특유의 품질 경영론이 다시 빛을 발하면서, 국내외 부품 협력사에 대한 전수 조사와 서울 양재동 글로벌 상황실의 실시간 품질 점검 시스템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정준양 포스코 회장도 최근 '100% 고객 만족'을 뜻하는 '클레임 제로화'를 주문, 눈길을 끌었다. 대한상공회의소의 조사에선 절반이 넘는 기업이 도요타 이후 품질과 안전 문제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고 있다고 답했다. 도요타 사태 이후 달라지고 있는 산업 현장들을 찾아가는 기획 시리즈를 시작하는 배경이다.
이를 통해 우리 기업들이 도요타를 뛰어넘는 한국식 품질 경영론으로 '포스트 도요타'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지를 따져본다.
"일반 영화에 비해 만화에서 느껴지는 3차원(3D) 입체감이 좀 약해 보이는데…. TV 리모컨 메뉴에서 만화쪽 3D 입체 영상 깊이감을 좀 더 올려 보는 건 어때? "
"만화를 볼 때, 3D 입체 영상 깊이감의 수치를 일반 동영상 시청 때 보다 두 단계 정도는 더 높여도 될 것 같은데요. 그렇게 해도 (만화 영상에서) 어지러움증이 심해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16일 오후 경기 수원시 삼성디지털시티에 마련된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 사업장. 이 업체 영상디스플레이 사업부 고객품질그룹의 신형식(48)부장과 이대웅(29) 사원은 3D 전용 안경을 착용한 채, 2차원(2D)으로 제작된 일반 영화 및 만화를 리모컨에서 3D 입체 영상으로 전환한 다음 TV 한 화면에 양분해 띄워 놓고 막바지 샘플 테스트에 한창이었다. 콘텐츠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3D 입체 영상 감성지수에 대한 삼성전자 TV의 자체 품질 평가는 그렇게 마지막까지도 까다롭게 계속됐다.
'무결점 완제품' 도전
3D TV는 물론, 액정화면(LCD)과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TV 제조를 전담하면서 1만여평 규모로 꾸며진 이 곳 내부 벽에는'품질이 최고다'(Quality is First)란 문구가 적힌 커다란 현수막들이 곳곳에 부착돼 있었다.
"출하되기 전까지, 하나의 TV 제품에서만 실시되는 평가 아이템이 165개 정도 됩니다. 이 평가 아이템을 모두 적용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모두 합쳐서 1만3,000 시간이 넘어요. 이 과정을 세 번 거쳐서 특별한 이상이 없어야만, 한 개의 TV가 포장 박스에 실려 고객들에게 선보일 준비를 어느 정도 마치는 셈이죠."
공장 안내를 맡은 이 업체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소속 임현재(48) 제조팀 과장의 설명은 진지했다. 임 과장은 특히 "최근 발생한 도요타 사태 리콜 이후, 현장에서 품질 불량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는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이 곳에서 '초기 품질 불량 제로'에 도전하기 위해 수명시험과 초고온 및 저온, 습도 등의 조건을 더욱 강화한 것도 도요타 리콜 사태와 무관치 않아 보였다.
실제 '초기 품질 불량 제로' TV 제작에 나선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 사업부의 의지는 제조를 포함한 전 생산 공정 단계에서 쉽게 드러났다. 각 조립 파트에선 3개의 컴퓨터(PC) 모니터가 설치돼 바로 전 단계의 공정 상황과 부품 공급 현황, 작업 진행 속도 등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면서 불량률을 낮추려는 해당 생산라인 직원들의 도우미 역할을 담당했다.
임 과장은 "일정 기간 이상 동안 제품 생산 공정과정에서는 물론이고 시장에 출하된 이후에도, 이상 징후가 발견되지 않은 제품 생산에 기여한 직원에겐 '무결점 사원'이란 타이틀과 함께 적절한 포상도 주어진다"고 귀띔했다. 임 과장의 설명을 반영이라도 하듯, 이 곳 현장 생산라인에선 '무결점'이라고 적힌 노란색 깃발을 획득한 직원들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품질검사 실험실, 모든 제품 밀착 해부
생산 공정과 제품 출하 직전까지 이상이 없다고 해서, 삼성전자의 무결점 현장 시계가 멈추는 것은 아니다. 포장까지 끝난 완제품을 창고 안에 72시간 동안 보관한 다음 무작위로 100개의 샘플을 뽑아 다시 재조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보통 TV 완제품이 소비자들에게 도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3일 정도거든요. 제품이 이동되는 사이에 혹시 생길지도 모르는 문제점까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삼성전자 TV의 품질 불량 제로화는 고객들의 손에 직접 전달되는 순간沮嗤?목표로 하고 있다는 게 임 과장의 설명이었다.
삼성전자에서 생산되는 모든 제품을 밀착 해부하는 고객서비스(CS) 환경센터 소속 '품질 검사 실험실'의 역할도 잠재 불량까지 잡아내는 철저한 색출 능력에 힘을 보태고 있다.
"각 사업부에서 1차 스크린을 거치지만, 여러 외부 환경 요인들에 의해 제품에 손상되거나 의심스러운 부분들을 다시 한번 검증하는 게 우리 임무죠.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완성품을 완전히 해부하다 보니, 밖에선 가끔 의사와도 곧잘 비유되곤 합니다." 이 곳을 책임지고 있는 손형주(48) 파트장의 얼굴엔 멋쩍은 웃음이 흘렀다.
덕분에 결실도 풍성하다. 2006년부터 세계 TV 시장에서 4년 연속 1위 자리를 지킨 삼성전자는 5년 연속 1위 자리를 놓고 맹렬한 질주를 거듭하고 있다. 올해 전략 제품으로 선보인 고성능의 3D TV 역시,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신성장동력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 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곳 현장에선 잠시도 긴장이 풀어진 모습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우리 제품이 수북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창고의 한쪽 귀퉁이에 쌓여 있었던 적이 있었어요. 한 순간의 방심이 운명의 추를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손 파트장의 목소리에선 비장함과 자신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 '이달의 품질개선 MVP' 김선희 사원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 사업부는 절대품질을 확보하기 위해 '이달의 품질개선 MVP'제도를 운여하고 있다.
이 상은 매월 시장에 출시된 삼성전자 TV를 기준으로 일정 기간 이상 동안 생산 공정은 물론, 시중 유통 과정과 애프터서비스(AS) 빈도 등 갖가지 항목에서 무결점에 도달한 사원에게 주어지는 사내 인센티브 제도다. 최근엔 수원 사업부 제조 현장에서 근무하는 김선희(36)사원이 MVP로 선정됐다. 예리한 눈썰미에 남다른 손 끝 촉감을 가진 그는 생산 작업 도중, 자체에서 느껴지는 촉감만 이상해도 파트장을 호출해 끝까지 원인을 찾아 토론을 벌인다.
삼성전자는 또 불량률을 최소화하기 위해 회사 차원의 현장 지원 시스템도 가동하고 있다. 이들 통해 잠재 불량이 일어날 수 있는 부분까지 점검하고 있다. 또 자율출근제 도입(2009년) 등을 비롯, 창의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가질 수 있도록 사내 분위기도 개선하는 데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수원=허재경 기자 ricky@hk.co.kr
■ 한국도 美 '말콤 볼드리지 국가 품질상' 만들자
품질 경영이 산업계의 새로운 화두가 되면서 미국의 '말콤 볼드리지 국가 품질상'(Malcolm Boldrige National Quality AwardㆍMBNQA) 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MBNQA는 1980년대 미 상무부 장관을 지낸 말콤 볼드리지에 의해 제안된 상. 당시 미국 상품의 경쟁력이 일본에게 뒤지면서 위기감을 느낀 그는 미국 경제의 약화 원인을 다방면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바로 품질이 관건이라 보고, 국가적 차원의 품질 혁신상을 고안하게 된 것. 특히 이 상은 미국 대통령이 직접 시상, 기업들도 최고의 영예로 여기며 이후 일본 기업들을 따라잡는데에 크게 기여했다. 또 수상 기업들의 경우 품질 혁신 노하우를 공개토록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도 MBNQA와 같은 상을 제정하거나, 국가품질경영대회를 좀 더 격을 높여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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