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언급한 대로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더불어 노동자들의 투쟁이 활성화했는데, 이에 두려움을 느낀 경영자 쪽은 깡패들로 구사대를 조직하여 노동자들의 투쟁을 폭력으로 저지했다. 그래서 도처에서 '구사대 폭력'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민통련 간부들도 구사대 폭력에 크게 당한 일이 있었다.
1985년 6월 민통련의 계훈제 부의장, 방용석 노동위원장, 정선순 간사, 김원갑 회원 등이 부당해고에 항의하기 위해 경기 부천의 한일스텐레스를 방문했는데, 정문에 도착하자 구사대가 들이닥쳐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 계 부의장의 갈비뼈 2개가 부러지는 등 온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극심한 폭행을 당했다. 이날 폭행당한 민통련 간부들이 입원한 부천의 성누가병원에는 김대중, 김영삼 등 유명인사들이 위문을 많이 와 구사대 폭력의 심각성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또 그해 6월 말에는 앞에서 언급한 '구로연대파업'이 격렬한 양상으로 진행되어 우리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특히 학생들의 노동운동 지원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때라 구로연대파업을 지원하는 학생들의 시위와 농성이 잇달아 사회적 긴장감이 팽배했다. 나는 이 파업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김문수와 친한 데다 이 파업을 주도한 김준용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이 청계노조 출신이어서 그들과 자주 만나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는 등 그들을 돕기 위한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런데 파업노동자들이 경찰의 탄압으로 더 이상 시위나 농성을 할 수 없게 되자 서울 창신동에 있던 전태일기념관으로 몰려와 농성을 벌였다. 김문수가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농성은 김문수와 심상정 등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들이 주도했는데, 그들이 내건 구호가 '자본가계급 타도' '민중권력 쟁취'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등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들이어서 경찰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전태일기념관 지붕의 기왓장들이 투석전에 쓰여 건물이 많이 훼손된 것도 문제였지만 전태일기념관이 사회주의자들의 소굴처럼 인식되는 건 중대 문제였다. 게다가 청계노조 조합원 가운데 상당수가 김문수 등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를 지향하게 돼 청계노조도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됐다.
이렇게 되자 이소선어머니가 그냥 있지 않았다. 전태일기념관이 훼손되는 것도 참을 수 없었지만 전태일기념관이 사회주의자들의 소굴처럼 인식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농성노동자들에게 기념관에서 나가줄 것을 요구했고, 이로 말미암은 논란과 갈등, 그리고 후유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리고 이 논란은 당연히 김문수와 나의 대립과 갈등으로 나타났다. 내가 김문수에게 사회주의 노선의 부당성을 지적하자 김문수는 나의 비판에 반발하면서 '역사적으로 학생과 노동자들의 주장이 틀려본 적이 있느냐'며 나를 엄청나게 비난했다.
그러나 나는 노동자계급의 진보성을 전제한 프롤레타리아독재 곧 사회주의는 이미 지난 시대의 이념으로 시대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던 터라 김문수 등의 비판이 거셀수록 내 주장은 더욱더 견고해졌다. 나는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민중주체민주주의를 강하게 주장했다.
흔히들 프롤레타리아독재 내지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반대하더라도 그것이 틀렸다고 보아서 반대하는 게 아니라 아직 한국사회에는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미약하기 때문에 반대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이미 노동자계급 이외의 농민, 자영업자, 중소상공인 등도 노동자계급 못지않게 정치의식이 향상되어 있어 굳이 노동자계급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보아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반대했다. 현실적으로 한국과 같은 정치후진국에서는 학생들이 노동자들보다 정치의식이 더 높고 정치적 역할도 더 큰 터에 노동자계급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건 탁상공론일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 모두가 나라정치의 주인이 돼야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도한다는 건 용납될 수 없다는 점에서도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는 인정되지 않아야 했다.
이념문제나 노선문제로 대립해서 심하게 논쟁하다 보면 인간관계에 금이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도, 김문수와 나는 그렇게나 격렬하게 다투고서도 상대방을 존경하고 신뢰하는 마음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지금도 그와 나는 정치적 견해가 크게 다르지만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건 전적으로 김문수의 인품이 출중한 때문이지만 그에 대한 나의 존경과 신뢰가 특별하기 때문이기도 할 거다.
내가 김문수를 처음 발견(!)한 건 1970년 봄 사회법학회 회원을 모집하러 서울대학교 교양과정부에 갔을 때였다. 그날 학생집회가 있었는데 마침 김문수가 발언하고 있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1학년 학생인데도 '학교에 들어오는 길 양쪽을 보면 미팅과 야유회를 알리는 벽보만 잔뜩 붙었는데, 미팅하고 야유회 가려고 대학에 들어왔느냐? 우리 학생들부터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일갈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이 발언을 듣고서 '저 친구 대단한데'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주목했다. 그 뒤 그는 학생운동을 하다 학교공부의 한계를 느끼고는 학교를 중단하고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노동운동에 헌신했는데, 당시로서는 대단히 모범적인 운동가의 자세였다.
김문수의 헌신성과 근면성은 정말 대단했다. 한 예로 쌍문동 이소선어머니 집에서 청계조합원들과 새벽까지 토론하다 잠을 자는 경우 이부자리가 부족해 이불을 덮지 못한 노동자들이 많았는데 그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무언가 덮고 자게 했다. 청소, 설거지 등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그와 함께 지내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헌신성과 근면성에 감복했다.
결국 김문수는 심상정 등과 함께 사회주의 지향성의 노동자정치조직인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결성을 주도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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