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칸 가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해요 배우의 자존심 지키는 것이 꿈이죠"
지난 15일 늦은 오후 배우 윤정희씨를 만났다. 흔한 카페도 호텔 커피숍도 아니었다. 서울 한남동의 한 오피스빌딩 1층, 비밀스런 장소처럼 설치된 몇 개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피아노 연습실에 딸린 조그만 휴게실이 나타났다. 그때 긴박한 소식을 전하듯 동석한 영화 홍보관계자의 휴대폰 문자소리가 울렸다. "'시', 칸 경쟁부문 진출!"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씨가 "여보 발표했다네"라고 다정하게 말하자, 윤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발표했대?"라고 되물었다. "축하 드립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자 미소 띤 윤씨의 얼굴에 붉은빛이 엷게 번졌다. 1994년 영화 '만부방'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후 16년 동안 스크린을 떠나 있던 한국 영화계의 큰별은 그렇게 수줍은 표정으로 스스로의 화려한 복귀를 맞고 있었다.
- 복귀작 '시'(감독 이창동)로 칸 국제영화제를 가게 됐는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우선 세계적으로 큰 영화제라 영화인으로서 너무나 기쁘죠. 그런데 저에게 복귀라는 단어는 해당이 안 되는 듯해요. 저는 영화를 떠나지 않았고, 한국 영화인들과 항상 같이 숨을 쉬고 있었으니까요. 단지 오랜만에 좋은 작품을, 좋은 감독과 만난 것뿐이에요."
- 그동안 연기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연기를 정말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나' 하며 방황하진 않았어요. 남편 연주여행 따라다니며 비서 노릇도 해야 하는 등 영화 촬영을 안 해도 할 일이 많잖아요. 마음만 먹으면 촬영장으로 달려갈 자세가 돼 있었으니까 초조하게 기다리진 않았어요."
- 오랜만의 연기라 힘든 점은 없으셨나요.
"카메라에 대한 부담은 전혀 없었어요. 하지만 제 역할을 어떻게 최선을 다해 소화할 것인가 하는 걱정만 앞섰죠. 이창동 감독의 연출 방식이 너무 마음에 들었고 저의 새 모습을 보여준다는 기쁨이 있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시'의 주인공 미자의 자연스러운 모습에 도달하긴 쉽지 않았지만요."
'시'에서 그는 생활보조금을 받는 어려운 형편에도 외손자를 업보처럼 떠안고 사는 60대 여인 미자를 연기한다. 동네 문학강좌에서 시에 눈을 뜨고 힘든 일상을 시에 기대던 그에게, 삶은 엉뚱하게 뒤틀린다. 이창동 감독은 애초 윤정희씨를 모델로 시나리오를 썼다. 배역 이름 미자는 윤씨의 본명(손미자)에서 비롯됐다.
- 역할을 제의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한 2년 전쯤 제 남편과 같이 식사하다가 출연 제의를 받았어요. 그땐 시놉시스조차 없었어요. 이 감독 작품을 다 봤고, 그를 훌륭한 감독이자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보지도 않고 결정을 내렸어요. 나중에 시나리오를 읽으니 아주 좋더군요. 믿었던 감독에게서 기대 이상의 시나리오를 만나게 된 거죠."
- 이 감독은 현장에서 마음에 드는 연기가 나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스타일이라 배우들의 원성도 높은데요.
"저희는 서로 대화를 많이 해서 그런지 힘든 점은 없었어요. 저는 이 감독이 의도하는 미자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너무나 큰 기쁨으로 받아들였어요. 이 감독은 마음이 따스한 분이에요. 인간적으로도 그를 좋아해요."
인터뷰 중에 백건우씨가 휴게실을 거쳐 연습실로 향했다. 윤씨는 "제 남편 연습해도 되죠"라며 양해를 구했다. 잠시 후부터 연습실에서 피아노 음이 1시간 넘게 울려나왔다. '건반 위의 순례자'라는 별명을 가진 세계적 피아니스트의 열 손가락이 빚어내는 서정적 소리가 인터뷰 내내 배경음악이 됐다.
- 남편을 옆에서 많이 도와주시는 편입니까.
"매니저는 따로 있고 저는 단지 연습 열심히 하고 훌륭한 연주를 하도록 도울 뿐이에요. 여러 나라의 인터뷰 스케줄과 사진 촬영 일정 등을 정하고, 연주에 방해되는 것은 막아요. 저는 재미있어요. 여행도 좋아하고 음악 좋아하니까요.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날 수 있고요."
- 남편 연주회를 항상 공연장 맨 끝자리에서 관람하신다면서요.
"다른 연주자의 연주는 그렇게 편하게 다가오는데 저의 남편 연주는 너무나 긴장하며 들어요. 앞자리에 못 앉고 조용히 뒤에서 눈도 못 뜨고 귀로만 들어요. 큰 연주회든 작은 연주회든 어쩔 수 없어요. 연주가 성공적으로 끝나 그 자리에서 재초청을 받으면 매번 감사 기도를 드려요. 제가 가톨릭 신자인데 묵주를 안 가지고 있으면 안 될 정도로 긴장이 되더라고요."
- 남편의 무대 옷차림 등에도 조언을 하시나요.
"당연히 아내가 해야 할 일 아닌가요. 보통 때는 저도 안 그러죠. 사진을 찍거나 음악회나 모임 등에 갈 때는 신경을 쓰기 마련이죠. 그냥 산책 나가거나 그럴 땐 신경 안 써요. 제가 메이드(하녀)는 아니잖아요. 서로 의견 듣는 게 좋잖아요. 저도 옷을 입을 때 남편한테도 묻기도 하죠."
- 머리 스타일이 바뀌지 않는데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제 머리는 남편이 잘라줘요. 머리 길다 싶으면 좀 잘라달라고 해요. 남편이 굉장히 손재주가 좋아요. 저희 집 가구는 남편이 거의 다 만들었어요. 자기 머리도 본인이 잘라요. 저는 지금 머리 스타일이 관리하기가 제일 쉽고 편해요. 퍼머도 동생이 집에서 해줬어요."
한국영상자료원 자료에 따르면 1967년 '청춘극장'으로 데뷔한 윤씨가 그동안 출연한 영화는 264편이다. 60~70년대 충무로 르네상스 시절 그는 문희, 남정임(1945~1992)과 이른바 '여배우 트로이카'를 구축하며 스크린을 빛냈다. 데뷔 이듬해인 1968년에만 50편, 1969년에 49편의 영화를 찍었다. 무려 1주일에 1편 꼴로 새로운 윤정희 영화가 나왔던 셈이다. 윤씨는 "재미있고 보람있는 고생이었고, 지나고 나니 즐거운 추억이 됐다"고 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텐데, 하는 생각으로 보낸 시기였다"는 것이다.
- 영화를 가장 많이 찍을 때는 동시에 몇 편까지 출연했습니까.
"3편을 하루에 동시에 찍기도 했어요. 아침에 다른 영화 장면 찍고, 저녁에 또 다른 곳에서 찍고 그랬죠. 옛날에는 지방에서 영화 시상식도 참 많았어요. 아무리 시골이라도 성의를 봐서 상을 받으러 다녔어요. 헬리콥터를 빌려서 타고 부산에 간 적도 있어요. 상 받고 나서 서울로 돌아와 촬영을 해야 하니 그 방법밖에 없었던 거죠. 이번에 우리 영화 두 편이 칸영화제 경쟁까지 가는데, 우리의 그런 고생이 밑바탕이 됐다는 걸 후배들이 조금은 알고 있어야 될 것 같아요."
- 급하게 만들다보면 작품 완성도와 연기에 대한 아쉬움도 많을 텐데요.
"부끄러운 영화도 당연히 많죠. 그때 당시에 제가 문학 작품을 옮긴 문예영화를 참 많이 했어요. '장군의 수염' '내시' '분례기' 등…. 그런 기가 막히게 좋은 작품들이 있었기에 부끄러움을 면할 수가 있는 듯해요."
- 트로이카로 불린 배우들과 신경전이 만만치 않았다면서요. 세 분이 함께 출연한 유일한 영화 '결혼 교실' 찍을 때는 제작사가 세 사람의 출연 분량을 속인 시나리오 3개를 따로 만들었다는 말까지 있던데요.
"라이벌 의식, 신경전은 대중들이 만든 말이에요. 시나리오 3개 에피소드는 처음 듣는 말이에요. 서로 작품이 많아서 아예 신경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서로에겐 도움이 됐어요. 그때는 상도 많아서 이번에 내가 타야지 하며 서로 열심히 경쟁을 했어요. 아쉽게도 문희는 일찍 연기를 그만두고 정임이는 너무 빨리 먼저 갔어요. 저는 죽을 때까지 연기할 사람이라 참 좋을 것 같아요. 제가 60대 중반에도 이렇게 좋은 역할 하잖아요. 우리는 삶을 그리는 직업인데, 삶은 한이 없잖아요."
1976년 결혼 후 파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윤씨지만 프랑스 친구들에게 단 한번도 출연작을 보여준 적이 없다고 한다. 여러 축제에서 그의 특별전을 기획해도 그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그럼에도 그가 '시'에 출연한다고 했을 때 벽안의 친구들은 모두 "칸! 칸! 칸!"을 외치며 응원했다고 한다. 윤씨는 "친구들에게 전화로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다"면서도 "기대는 금물"이라고 했다. "상에 대한 욕심이 크면 실망도 크다"는 것.
- 젊은 배우나 감독 중에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을 꼽는다면요.
"그걸 말하면 다들 서운해하죠. 요즘 배우들 얼마나 연기를 잘 하는지…. 제가 여자이니, 같이 연기하고 싶은 남자 배우가 딱 하나 있어요. 감독도 물론 꼭 함께 하고 싶은 분이 있어요. 신성일씨랑 99편을 했는데 꼭 100편을 채우고도 싶어요. 아마 세계기록일 걸요. 그래도 시나리오가 최우선이에요. 저랑 안 맞는 것은 안 해요. 배우의 자존심으로 좋은 작품을 하며 나의 인생을 마치겠다는 꿈이 있어요."
- 수상에 대한 욕심은 정말 없으십니까.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으면 배우로서 영광이죠. 그러나 저는 지금 충분히 만족해요. 단지 제 꿈은 우리 한국 팬들이 이 작품을 좋아하고, '청춘극장' 개봉 당시의 반만이라도 줄을 섰으면 좋겠어요. 가망성 있는 꿈 아닌가요. 공항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저희 볼 영화 없으니 빨리 새 영화 찍으세요' 했던 분들 잊지 않으셨죠? 제가 영화 찍었으니 약속대로 극장에 오셔야 돼요."
■ 윤정희 약력
▲1944년 광주 출생ㆍ본명 손미자
▲중앙대 영화전공 석사, 프랑스 파리3대학 영화전공 학사ㆍ석사
▲1967년 '청춘극장'으로 데뷔, 대종상 신인상, 청룡영화상 인기여우상 수상
▲1968년 '안개'로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상 수상
▲1969년 청룡영화상 인기여우상 수상
▲1970년 '독짓는 늙은이'로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연기상, 청룡영화상 인기여우상 수상
▲1971년 '분례기'로 대종상 여우주연상, '해변의 정사'로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연기상, 청룡영화상 인기여우상 수상
▲1972년 '석화촌'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
▲1973년 '석화촌'으로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인기상, '효녀 심청'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
▲1976년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
▲1992년 '눈꽃'으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연기상 수상
▲1994년 '만무방'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 수상
▲2006년 디나르영화제 심사위원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사진 김주영기자 will@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