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시간에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를 배울 때 '술 익는 마을'의 뜻을 배웠는지 기억이 없다. 술 좋아하시던 선생님이 직무유기를 하실 리가 없고, 아마 내가 한눈을 팔았을 것이다. 한동안 나는 그 시에서 '술=酒'라는 공식을 모르고 있었다. 다른 뜻을 가진 상징일 것이라고만 이해하고 있었다.
한참 뒤에서야 술 익는 마을에서 나는 술 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경주 최부잣집이 있는 옛 마을에 가면 가양주(家釀酒)인 법주 익는 내음이 자주난다. 그 집 법주는 찹쌀과 누룩만으로 빚는다. 추운 날 자주 술을 빚는데 그때쯤 술 익는 마을을 지나면 맑은 술 향기에도 스르르 취하고 만다.
알코올 16~18도 정도의 도수지만 빠르게 취했다가 마을을 빠져나오면 명징하게 깨는 즐거움이 있다. 최근 방송 촬영이 있어 경남 함양 지곡의 '술 익는 마을'을 찾았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정여창(鄭汝昌) 선생의 고택이 있는 옛 마을에서도 도도하게 술이 익어가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솔가지를 넣어 술을 빚었다. 솔향기가 솔솔 피어나는 법주가 있고 알코올 도수 40도의 차고 독한 술이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아 오래 술을 멀리 했는데 시인이 어떻게 지리산 아래 '술 익는 마을'을 그냥 지나랴 싶어 주인께 술을 청해 듬뿍 마셨다. 봄꽃 유정하게 피고, 술 익는 옛 마을에서 나는 꽃처럼 취했다.
정일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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