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한참 추울 때, 미국에 있는 매제에게서 신기한 이메일을 받았다. 집을 수리해야 하는데 ‘온돌 난방’이 좋다는 소문을 들었다면서, 실제로 어떤지 묻는 내용이었다. 한국식 온돌이 매우 좋다고 답을 보내고 나니 미국에도 더러 온돌 난방이 있는 연유가 궁금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뜻밖에도 미국의 온돌 역사는 오래됐다. 미국 건축사의 가장 유명한 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가 1916년 일본 도쿄의 제국호텔 설계를 맡아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제국호텔 투자자인 부호 오쿠라 키하치로(1837-1928)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 때‘조선관’에서 만난 온돌방에 매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에 돌아가 1930년대 후반부터 대중을 위한 주택을 설계하면서 처음으로 온돌식 난방을 적용, 미국의 온돌 역사가 시작됐다.
라이트의 온돌 난방은‘조선관’의 온돌과 달리 뜨거운 물을 파이프로 흘리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서양 주택이 대개 사방 벽체 안을 통해 난방을 하는 것과 달리, 한국 온돌처럼 바닥에 난방 파이프를 까는 방식을 쓴 것은 최초이다. 라이트의 온돌 주택은 처음 미국 중부 지방에 몇 채가 건축되었는데, 그 뒤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으나 틈새 시장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조선관’은 원래 경복궁에 있던 자선당(資善堂)이었다. 어떻게 경복궁 자선당이 일본에 건너갔을까?
오쿠라는 1915년 서울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를 준비하면서 자선당을 일본으로 옮겨 자기 집에 다시 세웠다. 그러나 자선당은 오쿠라의 사립 미술관 일부로 사용되다가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소실돼 주춧돌만 남았다. 그 뒤 1996년에 경복궁 복원사업을 하면서 자선당 잔석은 경복궁에 돌아왔고, 1999년에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라이트가 조선관, 그러니까 자선당의 온돌에 주목한 것은 그의 건축 세계가 자연 환경과의 조화를 중요시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는 건물의 높이, 위치, 방 배치 등을 친환경적으로 설계하는 것을 지향했다. 예를 들어 평야에 짓는 집은 단층으로 하고, 큰 창문은 남향으로 내는 것이다. 라이트는 온돌 난방도 친환경적이란 점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미국의 온돌 역사를 보면, 문화의 전파는 우연한 만남을 통해 이뤄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연한 것은 계획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라이트가 오쿠라의 초청으로 일본에 가지 않았다면, 자선당의 온돌을 체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에 앞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탈이 없었더라면, 자선당 온돌이 도쿄 오쿠라의 집에 옮겨질 리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한국의 온돌 난방이 다른 경로를 통해 미국에 전해졌을 수도 있지만, 그 경우 시간이 좀 더 걸리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조선 침탈과 식민지 역사는 한국인들에게는 큰 고통을 주었지만 일본인들이 도자기나 온돌과 같은 슬기로운 한국 문화를 높이 존중하고 미국에까지 전해지게 한 계기가 됐다. 미국의 온돌사는 인간의 역사처럼 선악이 얽힌 회색 지대이다.
문화 전파를 위해 온돌의 경우와 같은 우연을 계획할 수는 없지만, 기대한 결과가 나올 확률을 높일 수는 있다. 라이트와 같은 영향력 있는 인물이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리는 것이다. 지금도 한국은 많은 외국인들을 초청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한국 문화를 전파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닌 이들을 잘 선별하는 것이다.
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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