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구 신사동에는 '새로수길'이 있다. 이 길, 지도상에는 없다. 새로수길인지 세로수길인지 철자법도 사람마다 다르다. 그런데도 열정과 재능으로 똘똘 뭉친 젊은 디자이너들이 오늘도 이 길을 찾아 든다. 무엇이 이들을 새(세)로수길로 이끄는 것일까.
가로수길의 원형질을 품은 거리
새로수길은 서울 강남의 대표적인 패션소호 '가로수길'의 뒷골목쯤 된다. 청담동이나 압구정동이 뜨던 시절은 가고 가로수길이 한강 이남에서 가장 감각적인 거리로 주목받고 있지만 정작 트렌드리더들의 눈은 바로 그 뒷골목, 새로수길에 꽂히고 있다.
새로수길의 외양은 영락없는 변두리다. 낮은 다세대주택들이 어깨를 촘촘히 맞대 그려낸 꼬불꼬불한 골목길, 산발한 머리채를 위험천만 이고 선 전신주들, 허름한 평상을 내놓은 동네슈퍼들이 한껏 느린 삶을 영위한다. 작은 트럭이 확성기로 쏟아내는'배추~사려'가 한 순간 공기를 가르면 그뿐, 일상의 평온은 쉽게 제자리를 잡는다. 한국 최고의 부촌에서 맞닥뜨리는 이 낯선, 그러나 정겨운 풍경이 새로수길의 남다름을 만든다.
최근 2, 3년 사이 가로수길의 점포 보증금과 월세가 4배 이상 치솟으면서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디자이너들이 잇달아 상대적으로 월세가 저렴한 뒷골목 주택가로 작업실을 옮기고 작은 카페와 상점들이 뒤따르면서 발품 팔아 찾아가는 비주류적 감성의 새로수길이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신사동 가로수길 토박이인 인테리어디자이너 박성대씨는"가로수길이 대기업 자본의 침투로 대형화 상업화하면서 감성적인 매력을 상실한 반면, 새로수길은 가로수길 초기에 사람들을 끌어들였던 진정성, 고즈넉하고 독특한 공동체적 매력을 그대로 갖고 있다"고 말했다.
뚜렷한 정체성과 손맛, 언더그라운드의 매력
지난 2월 새로수길에 쇼룸겸 작업실을 낸 패션디자이너 스티브&요니 커플은 "청담동은 느끼하고 가로수길은 과포화상태인 반면, 새로수길은 마치 런던처럼 날 것 그대로의 아트 느낌이 살아있다"고 했다.
상업주의에 물들지 않은 간단치 않은 내공과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손맛, 작가주의 정신은 새로수길을 말해주는 단어들이다. 지난해 말 이 길에 매장을 낸 여성복브랜드 '누에 라보'의 최은경씨는 "디자이너의 공방과 갤러리, 사람 사는 느낌이 살아있다"고 평했다. 가로수길이 보세옷 거리로 변질되는 사이 새로수길에 디자이너의 감성을 담은 소수를 위한 매장들, 작지만 운치있는 카페들, 독특한 공방들이 자리 잡은 배경이다.
지난해 9월 하얀색 계단이 있는 반 2층 편집숍'모마 바이 YA'를 낸 신진디자이너 주이아씨는 매장에서 자신의 옷은 물론 기어3, 김기량 등 젊은 디자이너들의 작업도 같이 판매한다.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젊은 디자이너와 고객이 교감하는 버스정거장 같은 곳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강렬한 패턴과 색감으로 호평받는 이도이씨도 지난해 새로수길에 쇼룸겸 매장을 열었다. "어디서나 주목받는 사랑스러운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든다는 이씨는 '돌(doll) 바이 도이'(가칭)라는 이름의 세컨드브랜드를 곧 이 매장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벌거벗은 인형들을 입구 천정에 매달아놓은 범상치 않은 빈티지숍 '벨&누보'는 언더그라운드의 매력이 물씬하다. 각각 의상디자인과 파인아트를 전공한 김종실-최정민 듀오가 지난해 3월 오픈한 곳으로 파손된 반지와 귀걸이, 버려진 자동차키등을 이용해 기상천외한 오브제를 만들어내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밖에도 새로수길에는 차별화된 제품과 장인기질로 무장한 독특한 점포들이 곳곳에 숨쉬고 있다. 압구정동 쪽에서 들어오는 초입 스타벅스 옆쪽으로 위치한 '마이 패이보릿(my favorite)'은 오후2시 이전엔 도통 문을 열지 않지만 장난감과 외국 비주얼 관련 서적에 관한 한 최고의 상품을 자랑한다. 수작업으로 만든 전세계 100개 한정판 아톰 피규어를 살 수 있는 곳으로 예약자에 한해서만 상품을 보여준다.
'까렐'은 원래 가로수길에 있었지만 번잡한 게 싫어 2년 전 새로수길로 자리를 옮겼다. 강남 미시족들 사이에 소문난 곳으로 수천 종에 이르는 아기자기한 일본 직수입 생활소품들을 갖추고 있다. '소호&노호'는 국내에 플라워숍의 시대를 연 이혜경씨가 운영하는 곳으로 아름다운 꽃과 식물이 뿜어내는 향에 흠뻑 취할 수 있으며, '디자인파일럿'은 진땀을 흘리며 반신욕 중인 아저씨를 훔쳐보는 재미를 담은 티백 등 기발한 디자인상품들을 소개한다.
새로수길의 미래는 달라야 한다
모든 유행이 과잉으로 치닫다가 종국엔 새로운 유행에 자리를 내주듯 모든 패션거리도 뜨면 진다. 압구정동이 그랬고 청담동이 그랬으며 가로수길이 그랬다. 새로수길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남성복브랜드 '칼'의 이석태씨는 "거리가 뜨면서 임대료가 치솟으니까 자본력이 취약한 디자이너들은 뒷골목으로 옮겨간 게 새로수길의 시?이라며 "이 거리도 고유한 특성을 지켜내겠다는 원주민들의 의지가 없으면 언젠가는 가로수길의 전철을 밟지 않겠느냐"고 우려했다. 이씨는 가로수길의 지하작업실에서 출발, 1층에 매장을 낼 정도로 성공한 디자이너였지만 임대료를 감당 못해 얼마 전 브랜드 매장을 접었다.
박성대씨는 "새로수길이 살아남으려면 오밀조밀한 골목길과 곳곳에 박혀있는 디자이너숍들, 작고 운치 있는 카페들이 어우러진 고즈넉한 정취를 잘 유지해야 한다"면서 "건물주와 매장 운영자들이 함께 거리를 살리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로수길? 세로수길 철자법의 혼동은 이 거리에 대한 시선을 대변한다. 구경꾼에게 이 길은 신사대로와 압구정로를 직선으로 잇는 왕복 2차선 도로 가로수실을 가로로 놓고 그 사이사이 세로로 뻗은 좁은 골목길을 의미하기에 세로수길이다. 그러나 자기 색깔이 분명한 작은 공동체 문화를 기리는 사람들에게 이 길은 가로수길의 원형을 간직한 새로운 가로수길, 그래서 새로수길이다.
■ '누에 라보' 디자이너 최은경씨
"2000년대 초반 가로수길은 디자이너들에겐 마치 꿈같은 공간이었습니다. 좁은 인도를 따라 들어선 은행나무들이 사시사철 다른 색깔로 나부끼고 손맛이 담긴 물건을 내놓는 디자이너들, 공방들, 커피잔을 놓고 서로 아이디어를 나누는 정겨움이 물씬한 곳이었어요. 이제 새로수길이 그 바통을 이어가고 있지요."
붉은 벽돌 연립주택이 빼곡이 들어앉은 골목길에 꼭꼭 숨겨놓은 보석처럼 들어앉은 여성복매장 '누에 라보'의 디자이너 최은경씨. 신사동 가로수길이 패션거리로 뜨기 한참 전인 1999년께 이 거리에 첫 디자이너숍을 낸 가로수길 1세대 디자이너이다. 구호 앤디&뎁 박지원 등 스타디자이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국내 첫 디자이너브랜드편집매장 컬렉티드에 소개된 실력파로, 롯데백화점 애비뉴엘을 지휘했던 장선윤 전무가 그의 단골 고객이다. 현대그룹 등 재력가 사모님과 여식들도 그의 옷을 애용한다.
비슷한 시기 가로수길에 자리잡았던 오브제의 강진형, 임선옥씨 등은 모두 이 거리를 떴지만 최씨는 2006년 매장을 철수하고 작업실만 유지하다 지난해 10월 새로수길에 새롭게 자리잡았다.
"가로수길이 갑자기 뜨면서 스타벅스 같은 대기업자본이 들어오고 거리가 카페거리로 변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브랜드명이 '누에'였는데 한창 이름을 날릴 즈음 갑자기 건물주가 카페를 한다고 매장을 비우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디자이너로서 첫사랑이었던 신사동을 뜨기는 쉽지 않았다.
"단 1명이라도 가로수길의 유년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한 켠에 누에가 있을 테니 이 거리를 아예 떠날 수는 없지요. 아직은 덜 개발됐고 그래서 값은 쌈직하지만 나름대로 고집을 갖고 작업하는 이웃들이 있는 새로수길에서 다시 고객과 소통하는 길을 모색 중입니다."
누에는 프랑스어로 '폭풍 속의 고요'를 뜻한다. 꼭 새로수길의 오늘을 닮았다. 최씨는 "상업화의 폭풍우가 몰아쳐도 흔들림 없이 자기 색깔을 가져가는 디자이너로, 길로 남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 대형 자본 침투·상업화… 원조 가로수길 '정체성' 몸살
"지금 가로수길을 움직이는 건 주민들이 아니에요. 대기업 자본과 부동산들이죠."
"전에 가로수길은 고요하지만 힘이 있는 곳, 영감을 주는 곳이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움직임은 엄청 많지만 정작 알맹이는 없어진 것 같아요."
신사동 가로수길은 요즘 지독한 몸살을 앓고 있다. 감각적인 거리로 소문 나면서 쇼핑객과 관광객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과 비례해 특유의 정체성은 빠르게 사라져간다는 우려가 높다. 군데군데 진행중인 매장 공사가 통행을 방해하고, 오전 11시면 이미 길 양쪽에 빼곡하게 들어서는 차량들로 거리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긴 난망이다. 야트막한 건물들과 좁은 인도를 따라 출렁이는 은행나무, 그 사이에 들어선 작고 예쁜 공방들과 카페들이 이 거리의 명성을 만들었지만 지금 가로수길은 대형화 상업화가 현란하게 진행되는 여타 강남의 거리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가로수길의 부흥을 이끈 주역으로 꼽히는 플라워카페 '블룸&구떼'의 조정희 대표는"가로수길에 들어선 대기업 소유 브랜드 커피점만 봐도 이 길이 처한 현실을 알 수 있다"고 했다.
2004년 오픈 당시 가로수길은 저녁 8시면 '박쥐가 날아다닌다'고 할만큼 적막했고 블룸&구떼는 그 거리의 유일한 카페였다. 그러나 지금은 스타벅스를 비롯, 커피빈 톰앤톰스 네스카페 투섬플레이스 코코부르니 일모카페 등 대기업 소유 대형커피점들이 가로수길 한편을 점령하다시피 했다. 케이트스페이드 질스튜어트 TNGT우먼 등 대기업 소유의 브랜드매장과 컨셉트와 상관없이 박리다매를 하는 보세옷집들도 속속 들어서고 있다. 2005년 가을 방송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촬영지로 가로수길이 알려지고 '김삼순 드라마 투어'가 나올 정도로 쇼핑객과 관광객이 급증하자 소비 수요를 간파한 대기업들이 속속 진입한 결과다.
유동인구가 많아지면서 땅값과 임대료도 치솟았다. 2005년 평당 3,000만원 가량 하던 땅값이 요즘은 1억원을 훌쩍 넘는다. 임대료는 더 놀랍다. 가로수길에 있는 N부동산 관계자는 "가로수길 1층에 10평짜리 매장을 얻으려면 권리금만 2억~2억5,000만원, 보증금 7,000만원에 월세 400만원을 내야 한다"며 "그나마 빈 매장도 없지만 대기업 아니고서야 이 월세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월세가 치솟으면서 거리 형성의 주역이었던 디자이너들과 공방들은 뒷길로 밀려나거나 이 거리를 떠나고 있다. 가로수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였던 서상영씨와 정욱준씨가 매장을 철수했고 곽현주와 이석태씨는 브랜드를 접고 대신 편집숍 매장을 열었다. 새로수길의 탄생은 이들처럼 자본력이 취약한 디자이너와 공방들이 아직 개발이 안된, 상대적으로 집값이 싼 뒷골목으로 이동한 결과다.
가로수길이 뜨면서 낮과 밤, 주말과 주중이 달라진 것도 신풍속도다. 패션매거진 'J룩'의 신동선 편집장은 "가로수길이 여느 카페거리와 다를 바 없어지면서 독특한 디자인거리를 원하는 패션피플의 관심은 적어진 반면 관광객들을 위한 소비문화는 엄청 발달했다"고 했다. 밤의 가로수길은 잡다한 액세서리를 파는 노점상들이 촘촘이 들어서고, 주말에는 카페에서 브런치를 즐기려는 미시족의 발길이 이어진다는 지적이다.
유동인구가 늘면서 청담동에서나 볼 수 있었던 발레파킹이 곳곳에 들어선 것도 눈길을 끈다. 장난감 및 수입서적 전문업체 마이패이보릿의 배용태 대표는 "저녁이면 발레파깅하는 차들 때문에 거리가 아수라장"이라며 "조용하고 특별했던 가로수길이 시끌벅적 획일화되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상업화와 대형화에 염증을 내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렇다고 과감히 이 곳을 떠나기도 쉽지는 않다. 젊은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들에게 이 곳은 여전히 기회의 땅이기도 하다. 새로수길을 통해 '범 가로수길' 에 새로이 접목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로 제작환경을 꼽는다.
패션디자이너 이도이씨는 "고급의류 제작에 필수적인 장인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고 말했다. 신사동 가로수길의 탄생 자체가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하이패션 디자이너들이 1970년대 말부터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샘플제작사와 패턴사, 단추구멍업체 등이 함께 이전해 상대적으로 집세가 싼 이 곳에 자리잡은 것에서 출발했다. 현재도 이곳엔 가내수공업 형태의 샘플제작사만 100여곳을 훌쩍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벨&누보의 김종실씨는 "생경한 아트오브젝트 작업도 '재미있다'고 관용해주는 분위기가 이 거리의 장점"이라고 말한다. 벨&누보는 그 관용에 힘입어 다음달께 가로수길에 두번째 매장을 열고 진출한다.
가로수길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들은 말한다. 거리의 흥망성쇠는 결국 사람의 손에 달렸다고. 아트디렉터 박성대씨는 "건물주들도 지난 1, 2년간은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개발바람에 휘둘렸던 것으로 봐야 한다"며 "이 거리의 특별한 멋과 흡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거주인들과 건물주들이 함께 거리의 미래를 위해 고민하는 시점이 곧 읒?않겠느냐"고 기대했다.
■ 가볼 만한 아울렛 매장
가로수길이 뜨면서 눈에 띄게 많아진 것이 아울렛 매장이다. 주머니가 얇지만 수입의류에 대한 선호는 높은 젊은 쇼핑객들이 많아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 A&H 뉴욕 스테이트 아울렛-가로수길에 가장 먼저 자리잡은 아울렛. 유행 민감도 보다는 가격 만족을 추구한다. 남녀의류는 물론 구두, 모자, 벨트, 속옷 등 액세서리를 총망라하고 가격대도 1만원짜리 티셔츠부터 6만원짜리 니트원피스까지 저렴하다. 유명 브랜드는 적지만, 다양한 사이즈를 구비한 구두류가 반응이 좋다. 544-0229
● G533 아울렛-오픈한 지 꼭 한 달 된 따끈따끈한 매장. 세련된 매장 및 셀렉션으로 유명한 가로수길 편집숍 G533가 2층 매장을 아울렛으로 바꿨다. 장 폴 골티에, Y3 요지 야마모토, 라프 시몬스 등의 재고상품을 50~90%까지 할인판매한다. 가격표에 할인율 별로 색깔 스티커를 달리 붙여놓아 편리한 쇼핑이 가능하다. 544-5338
● 일모 아울렛&카페-제일모직에서 운영하는 아울렛으로 고가 편집매장 10꼬르소꼬모서울의 대표 브랜드인 알라이아, 꼼데가르송, 니나리찌 등 유명 브랜드의 한 시즌 전 상품을 최고 60%까지 할인된 가격에 판매한다. 의류 외에도 화장품과 향수 등 다양한 제품을 만날 수 있다. 재킷 50만원대, 바지 20만원대, 구두 20만원대. 512-9648
● 프리미엄아울렛 라움-LG패션이 운영하며 TNGT우먼 매장 지하에 있다. 이사벨 마랑, 조셉, 모그, 제롬 드레이퓨스, 아메리칸 레트로 등의 브랜드를 30~80%까지 할인판매한다. 이사벨 마랑의 50만원대 재킷이 20만원대에 나와있다. 511-5956
■ 거리 미관 오히려 망친 행정
"거리를 살린다고 한 것이 오히려 대표적인 탁상행정이 됐지요. 가로수길의 멋을 죽인 셈이 됐으니까요."
신사동 가로수길 토박이들은 행정당국에 불만이 꽤 많았다. 대표적인 불만 사례는 대리석으로 깐 보도블록이다.
신사동 가로수길이 주목받기 시작한 2004년께 이 길은 높아야 3, 4층 건물에, 은행나무가 심어진 좁은 인도에는 녹색 우레탄 블록이 깔려 있었다. 은행 잎이 노란색으로 물들 무렵이면 녹색 보도와 어울려 환상적인 풍광을 자랑했고 탄력이 있는 우레탄 블록은 걷는 맛이 남달랐다.
그런데 거리가 뜨면서 강남구청이 이곳 발전을 위해 가로등지중화 사업을 시작했고 우레탄 보도는 뜯기고 대신 대리석 보도가 깔렸으며 조명등이 땅에 심어졌다. 문제는 이 대리석 블록이 걷기에 불편한 데다 겨울철 눈길엔 심하게 미끄러워지는 것. 더구나 지면에서 위쪽으로 빛을 뿜어내는 조명등은 보행자의 눈을 지나치게 자극해 주민들 사이에서도 원성이 자자했다.
한 상가 주인은 "원성이 높아지니까 최근엔 조명등을 아예 꺼놓더라"며 "처음 강남구가 거리정비를 하겠다고 했을 때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촘촘히 서있는 전신주를 지중화하는 걸로 알고 환영했었는데 그건 여전히 그대로 있다. 도대체 걷고 싶은 정감 어린 길에 대한 이해가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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