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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50년을 말한다] <12>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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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50년을 말한다] <12>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입력
2010.04.14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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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ㆍ19 혁명은 한국 현대사의 큰 분수령이다. 광복 후 정부를 새롭게 조직한 한국이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사를 변혁시킨 이 사건은 회상할 때마다 마냥 긍정적인 면만 남기는 것은 아니다. 보람과 긍지를 먼저 느끼게 되지만, 개인적으로는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고, 4ㆍ19세대를 생각하면 실망스러운 마음 또한 없지 않다.

먼저 개인적으로 죄송한 마음이다. 4ㆍ19 당시 군에 있었기 때문에 반독재를 외치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회복하자는 학생들의 그 대열에 나는 직접 참가하지 못했다. 대학 3학년이 되려던 1959년 3월 중순 나는 소집영장을 받아 군에 입대하였다. 전후반기 훈련소를 거쳐 근무하게 된 곳은 6사단 공병대대였다. 입대한 지 1년 후, 1960년 3ㆍ15 대통령 선거를 군에서 치르고 가장 먼저 몇 주간의 휴가를 갖게 되었고, 군에 복귀하는 날이 4월 19일이었다.

귀대하는 날 새벽에 청량리에서 춘천행 기차를 타자면 미리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시위는 이미 지방에서 서울로 파급되고 있었다. 4월 18일 고려대생 시위대가 종로4가 근처에서 깡패들의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은 그 날 저녁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흥분하면서 곧 무슨 사건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를 느끼면서 그 이튿날 새벽에 춘천행 열차를 타고 춘천을 거쳐 귀대했다. 귀대하는 그 날 서울에서 터진 4ㆍ19혁명 소식은 부대에 도착해서도 계속 라디오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근무하는 공병대대장(참모)실에서 라디오를 통해 짬짬이 혁명의 진행을 들으면서 계속 흥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학 친구들이 일군 그 혁명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 학적 보유자로 그 해 9월 조기 전역한 후, 혁명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죄송한 마음으로 선후배 동료로부터 4ㆍ19혁명의 영웅적인 활동을 익히 들을 수 있었다. 동학 김치호군이 산화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을 금치 못했다.

4ㆍ19세대에 대한 유감

한편 4ㆍ19를 회상하면 유감스러운 것도 있다. 소위 4ㆍ19세대의 변신과 변질이다. 4ㆍ19세대 중 이 나라 민주화의 초석을 놓은 민주혁명정신에 굳게 서서 한국의 인권 민주화를 끝까지 파수하는 이들이 몇 안 된다는 소식이나, 그나마도 4ㆍ19세대 중 국가 포상에 혈안이 되어가면서 서로를 모함하고 있는 현실은 유감스러운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4ㆍ19혁명 1년 후 5ㆍ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4ㆍ19혁명을 부정하는 쿠데타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혁명정신을 계승한다는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4ㆍ19세대 중에서는 군사정권과 야합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앙정보부가 생기자 거기에 몰려가 머리를 빌려주더니, 급기야 군사쿠데타 세력이 만든 당과 정부의 요직에 이름을 걸치거나 몸을 파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4ㆍ19정신과는 다른 길을 걸었고, 4ㆍ19가 지향하던 민주화와 인권에 역행하는 일에도 적극 동참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유신정권에까지 깊숙이 관여하는 이들도 나타나게 되어 실망을 금할 수 없게 했다.

실망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 몇년 사이에 보인, 4ㆍ19세대 중 몇몇 인사들의 국가적 포상에 집착하는 자세에도 유감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4ㆍ19혁명정신을 부정한 정권에 빌붙은 세력에게조차 4ㆍ19세대라는 이유로 포상을 하자는 데에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그들이 과연 4ㆍ19혁명세대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

혁명의 참된 의미

4ㆍ19혁명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룩하고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고양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식민지 국가에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한 몇 안되는 모범적인 나라라고 칭송되고 있다. 한국의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룩한 가장 중요한 계기가 바로 4ㆍ19혁명이라고 이해한다.

4ㆍ19혁명의 원인은 먼저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서 찾을 수 있다. 민주주의의 토대는 공정한 선거로 담보되는데, 그들은 새롭게 정착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근간을 부정선거로 흔들었다. 1948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은 1952년 국회의 선거를 통해서는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발췌개헌이라는 편법을 동원, 종래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던 제도를 국민이 직접 선출하도록 하는 제도로 바꾸고 재선되었다. 이 선거는 6ㆍ25전란 중에 치러졌다. 1980년대 신군부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체육관 대통령 선거'를 고집할 때, 거기에 반대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한 이들은 6ㆍ25전란 중에도 대통령직선제를 시행했는데 왜 평시에 대통령직선을 할 수 없느냐고 항의한 적이 있다. 직선제를 시행하자는 주장은 타당했지만, 전란 중의 직선제 시행이 그렇게 민주주의적 동기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하여튼 이렇게 직선제로 바꾼 후 이승만은 '사사오입'이라는 기상천외한 불법적인 방법으로 3선개헌을 단행하고 1956년에 대통령에 3선되었고, 1960년에도 대통령에 출마하였다. 이 몇 차례에 걸친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온갖 불법투표를 자행하여 이 나라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했다. 여기에다 자유당 정권은 늙은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고 온갖 불법과 부패를 자행했다. 4ㆍ19혁명은 이같은 부패와 부정선거를 바로잡아 이 나라 민주주의를 살리는 한편 불의와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을 민주제단에 올려 놓았던 것이다.

민족주의 새롭게 정립

4ㆍ19혁명은 이 나라 민주주의를 회생시킨 것을 토대로 하여 평화통일 문제를 부각시켜 민족주의를 새롭게 정립시켰으며, 산업화의 기틀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남북의 갈등과 대결은 통합정부를 세우려는 중도파 세력의 입지를 약화시켜 버렸고, 급기야는 6ㆍ25전란으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남북을 갈라놓았다. 남과 북은 상대방을 괴뢰라 비난하면서 부정적인 경쟁을 부추겼고, 민족적 과제인 통일 문제는 뒷전에 미루고 말았다. 통일의 방안도 남측이 북진통일, 멸공통일론을 주장하고 있을 때 북측은 적화통일과 공산혁명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4ㆍ19혁명은 전쟁통일론 대신 평화통일론을 대두시켰고, 북을 멸공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와 통일의 동반자로 수용하는 단계로까지 우리의 의식을 전진시켰다. 비록 젊은 청년 학생층의 주장이긴 하지만,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슬로건은 통일을 위해서는 대화와 민족적 대단결을 모색하자는 것이었다. 통일 지향의 소박한 민족주의가 이때에 와서 활성화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5ㆍ16은 이들 평화통일 세력을 한때 근절시켰다.

이와 함께 민족주의에 기반한 국학 운동이 이때 새롭게 대두되었다. 국학민족운동은 한말 일제하에 대두되었고 해방 직후 한때 열렬히 고양되었지만 냉전 체제의 강화로 점차 쇠락해졌던 것이다. 4ㆍ19혁명을 계기로 국사, 국문학, 민속학 등의 국학이 부흥하고 민족예술이 고양되기 시작하였다. 국사학에서 단재 신채호와 백암 박은식의 저술이 복간되고 그들의 민족주의 역사학이 새롭게 음미된 것은 이 때문이다. 국어국문학 연구도 활성화되었고 그 동안 사라지다시피한 전통적인 민족음악과 예술이 복원작업에 시동을 걸게 된 것은 4ㆍ19가 남긴 중요한 결실이다. 이렇게 4ㆍ19를 통해 일어난 민족의식은 민족문화를 복원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민주화로 산업화 견인

근자에 와서 한국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한 나라로 거론되고 있고 우리 스스로도 이를 자부하고 있다. 어떤 이는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을 대별하면서, 이들 양대 세력을 적대적인 관계로 이분화하는 경우도 본다. 또 어떤 이는 한국이 산업화를 통해서 민주화를 이룩해 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의 민주화와 산업화는 서로 자극을 주면서 발전해 왔다고 생각하며, 꼭 선후를 가려야 한다면 한국의 민주화가 산업화를 견인했다고 믿는다. 민주화가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을 신장시켜 갔기 때문에 그걸 바탕으로 자발적인 산업화 세력이 형성되어 갔던 것이다.

산업화의 열매가 재벌로 귀결되는 현실은 왜곡된 역사진행이며 또 산업의 민주화에 역행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민주화를 통해 나타난 자유와 창의성이 담보되지 않고는 산업화의 업그레이드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민주화는 산업화를 도약시키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믿는다. 한국 산업화의 견인 역할이 민주화에 있었다면 그것은 4ㆍ19혁명으로부터 재래된다는 점을 확실히 하고 싶다.

한국사상 최초의 민중혁명

4ㆍ19혁명이 남긴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한국 역사상 민중에 의한 밑으로부터의 최초 혁명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민중의 민주적 역량이 그렇게 강고하게 보였던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승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준다. 우리 역사에서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던 민주 역량이 4ㆍ19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가능성을 약속했던 것이다.

4ㆍ19를 통해 그 가능성을 확인한 민주적 역량이 그 뒤 군부독재의 유신체제를 무너뜨렸고, 신군부세력을 굴복시켜 이 나라 민주화를 꿋꿋하게 지켜 나갔던 것이다. 검증된 그 가능성이 앞으로도 어떤 반민주세력을 만나더라도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과 에너지를 우리 역사에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확신한다.

■ 약력

▦1938년 경남 함안 출생 ▦1963년 서울대 사학과 졸업, 1986년 동 대학원 박사 ▦1970~2003년 숙명여대 교수 ▦1999~2001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냄諍옐玲П맑弩?▦2001~03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2003~06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저서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흐름> <한국 기독교 수용사 연구> <한국 기독교 의료사> 등 ▦독립기념관 학술상, 용재상 등 수상 ▦현 숙명여대 명예교수

홍인기 기자 hongi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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