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속인 충북 A 군수는 올해 초 기자회견을 자청해 "나는 영원한 군민당(郡民黨) 소속"이라고 공언했다.
그가 6ㆍ2 지방선거를 한참 앞둔 시점에 무소속으로 남을 것임을 새삼 확인한 이유는 자신이 유력 정당에 입당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떠돌았기 때문이다. 당시 그를 두고 정당 간 물밑 영입 경쟁이 뜨겁게 전개됐다. 정당 사람들과 지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회유하고 입당설까지 퍼뜨리는 바람에 일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는 "정당의 옷을 입는 것이 편한 길인 줄 알지만 그것이 중앙 정치의 시녀가 되는 길이기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전남 B군수는 최근 민주당을 탈당했다. 민주당 텃밭에서 당적을 버린 이유에 대해 그는 "당이 싫어서가 아니라 기초단체장 정당공천 반대라는 소신을 지키기 위해"라고 밝혔다. 그는 "정당공천제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희망을 짓누르는 족쇄 같은 존재"라고 목청을 높였다.
지방의 선량을 꿈꾸는 사람 중에 정당공천의 유혹을 뿌리치는 소신파가 일부 있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두꺼운 현실 정치의 벽에 갇혀 버리기 일쑤다.
중앙당의 공천장이 여전히 지방선거에서 보증수표로 통하기 때문이다. 많은 지역에서 정당공천이 당락을 가르다 보니 후보들은 오로지 정당의 눈치만 살피며 공천에 올인한다. 백년대계와 정치적 중립을 위해 정당공천이 배제된 시ㆍ도교육감 선거판도 마찬가지다. 교육의 수장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지역의 유력 정당을 등에 업으려 혈안이 돼 있다.
후보들이 너도나도 공천에 사활을 걸고 뛰어들면서 공천 헌금, 밀실 야합 등 공천 비리는 일상사가 돼 버렸다. 최근 한 지역 선거관리위원회는 지방의원 등 5명을 정당공천 명목으로 불법 정치 자금을 받은 혐의로 수사 의뢰했다. 또 예비후보 2명으로부터 공천 대가로 억대의 자금을 받은 국회의원 보좌관도 검찰에 고발됐다. 지역 선관위 관계자는 "특정 정당의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곳에서 은밀한 뒷거래로 공천 장사를 하려 한 경우"라고 말했다.
공천권을 쥐고 있는 국회의원에게 줄을 대는 행태도 여전하다. 충북 C선거구에서는 출마예정자들이 지역구 의원에게 잘 보이려고 의원 집안의 대소사까지 시시콜콜 챙긴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모 정당 당직자는 "일부 출마예정자는 중앙당과 도당 가리지 않고 행사마다 뻔질나게 얼굴을 내민다"고 귀띔했다. 2월 한 대형 포털 사이트에 대구 출신 의원을 지지하기 위해 개설된 인터넷 카페에는 'XXX 예비후보 추천으로 가입했습니다'는 제목의 글이 수백 건 쏟아졌다. 지방선거 출마 예정자들이 지역구 의원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주변 사람들을 경쟁적으로 카페 회원으로 가입시킨 것이었다. 결국 대구선관위가 나서 후보들에 대해 구두 경고하고 자제를 당부하기에 이르렀다.
정당공천제가 갖가지 병폐를 낳자 2006년 5ㆍ31 지방선거를 전후해 시민 단체를 중심으로 폐지 운동이 시작됐다.
그리고 지난해 3월 기초지방선거 정당공천제 폐지를 위한 범국민운동본부가 출범해 1,000만명 서명 운동에 착수했다. 7월 들어 사회 원로들이, 10월에는 학계 전문가들이 정당공천 폐지를 위한 선거법 개정을 잇따라 촉구하고 나섰다. 이어 전국 시∙군∙구자치의회의장협의회가 기초의원 정당공천 폐지를 중앙 정치권에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국회의원 연구모임인 지방자치발전연구회가 2008년 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국 기초단체장과 지방의원의 73.9%가 정당공천제 폐지에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행 유지를 원하는 사람은 19.3%에 불과했다.
그러나 국회 정치개혁특위는 지난해 12월 지방의원과 단체장에 대한 정당공천제를 유지하기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정당들은 "정당공천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알지만 정당이 책임정치를 구현해야 한다는 점, 후보가 난립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공천 유지가 현명하다"고 주장했다. 또 "대의제 민주주의가 올바로 작동하도록 공천의 민주화와 투명화 등 대안을 꾸준히 마련하면 부작용이 줄어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정당이 주장하는 책임정치나 후보 난립 문제도 가볍게 치부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정당공천의 부작용을 없애면서 정당의 책임정치도 구현할 수 있는 다양한 대안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 한 지역 정치인은 "광역단체장과 광역의원은 정당공천을 하도록 하되 공천 투명성 기준을 높이고, 기초단체장과 기초의회는 공천을 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김용태기자 kr8888@hk.co.kr
청주=한덕동기자 ddhan@hk.co.kr
■ "공명선거 배달" 전북 집배원들 뭉쳤다
전북의 우체국 집배원 800여명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공명 선거에 발벗고 나섰다.
이들은 6ㆍ2 지방선거를 앞두고 2월부터 우편 오토바이와 택배 차량에 '돈 선거를 추방합시다'라는 구호를 새긴 홍보판과 안내문을 부착하고 다니면서 공명 선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또 배달 도중에는 후보의 불법 선거 운동이 없는지도 철저히 감시 중이다.
이에 앞서 전북 지역 15개 시ㆍ군ㆍ구선관위는 이번 선거를 깨끗하고 공정하게 치르기 위해 2월8일 정읍우체국을 시작으로 3월 말까지 각 우체국과 협약을 맺고 집배원들을 공명 선거 홍보요원으로 위촉했다. 공명 선거 정착을 위해 관공서들이 협약을 맺은 것은 처음이다.
이 협약은 집배원들이 날마다 도시 아파트부터 산골 마을까지 다니면서 다양한 주민을 만나고 배달 과정에서 불법 홍보물 배포 등 부정 선거 행위도 포착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도선관위가 제안했다.
이번 선거는 지역에서 예상 후보자가 900여명에 이르고 후보 선거사무 관계자까지 합쳐 핵심 감시 대상자만 2,700여명에 달한다. 그러나 도선관위와 시ㆍ군ㆍ구선관위 종사자는 136명, 선거부정감시단원은 500여명에 불과하다.
이여상(56) 정읍우체국 홍보팀장은 "집배원들이 공명 선거 캠페인을 펼치면서 지역사회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보람과 자부심 느끼고 있다"며 "오토바이를 타고 골목마다 누비고 다니기 때문에 불법 선거운동 차단 효과가 커 예년에 비해 불법이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집배원들은 앞으로 우체국 소포상자에도 공명 선거 표어를 붙이기로 했다. 또 5월20일 이후에는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주민과의 1 대 1 대화를 벌일 계획이다.
도선관위는 공명 선거와 투표 참여 캠페인을 위한 깃발 안내문 홍보물을 지원하고 위법 선거 사례를 신고하거나 제보한 집배원들에게 포상금도 지급할 예정이다.
정읍=최수학기자 shchoi@hk.co.kr
■ 안성호 대전대 교수 "중앙 정치에 예속 지방분권 근간 위협"
"한국의 지방선거는 지방이 실종된 선거다."
지방분권국민운동 공동대표인 안성호(57ㆍ사진) 대전대 행정학부 교수는 "현재 지방선거는 지역 주민의 의사를 묻는 선거가 아니라 정당과 정부에 대해 평가하는 중앙 정치의 연장선"이라며 "이 때문에 지방분권이라는 지방자치제의 근간이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방선거가 중앙 정치의 일환으로 변질되는 가장 큰 이유는 정당공천 때문이다. 그는"현대 민주주의에서 정당정치의 중요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며 "그러나 지방자치의 기본 단위인 기초의원과 기초단체장 후보까지 정당공천이 이뤄지면서 지방 정치가 중앙 정치에 예속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당 내 민주주의의 후진성이 정당공천의 문제점을 증폭시킨다고 강조했다. 한국 정당들은 후보 공천 때 대부분 당원들의 뜻을 반영하지 않고 국회의원이나 지역당원협의회장이 사실상 결정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여론 조사나 경선을 통한 후보 선출도 지역 의원이나 당원협의회장의 의중이 주요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에 후보들은 당연히 이들에게 줄을 설 수밖에 없다. 당선 후 이들의 청탁을 배제하기 어려운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지역에 따라 특정 정당에 의석을 몰아 주는 투표 행태 역시 폐해가 크다. 이런 지역에서는 공천이 곧 당선을 의미하기 때문에 후보들이 더욱 지역 의원과 당원협의회장에게 목을 맬 수밖에 없다.
안 교수는"당비를 내는 진성당원들이 공천권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당내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일당 독점 투표 행태가 개선될 때까지만이라도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에 대한 정당공천을 유보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대전=허택회기자 thhe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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