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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아름답게 시작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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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아름답게 시작하는 시

입력
2010.04.13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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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익했다

그래서 너는 생각했다 무엇에도 무익하다는 말이

과일 속에 박힌 뼈처럼, 혹은 흰 별처럼

빛났기 때문에

그것은 달콤한 회오리를 몰고 온 복숭아 같구나

그것은 분홍으로 순간을 정지시키는 홍수처럼

단맛의 맹수처럼 이빨처럼

여자뿐 아니라 남자의 가슴에도 달린 것처럼

기묘하고 집요하고 당황스럽고 참 이상하구나

인유가 심한 시 같구나

그렇지만 너는 많이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농부가 가지에서 모두 떼어버리는 과일들처럼…

여기까지 시작되다가

이 시는 멈춰버렸구나

투명한 삼각자 모서리처럼 눈매가 날카로운

관료에게 제출해야 할 숫자의 논문을 쓰고

“아무도 스무 살이 이토록 무의미하다는 걸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라고 써보낸 어린 친구에게 짧은 편지를 쓰고

나보다 잘 쓰면서

우연히 나를 만나면 선배님의 시를 정말 좋아했어요, 라고 대접해주는 예절 바른 작가들에게,

빈말이지만, 빈말로 하늘에 무지개가 뜬다는 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는 일이니까,

빈말이 아니더라도 ‘좋아해요’와 ‘좋아했어요’의 시제가 의미하는 바를 엄밀히 구분할 줄 아는

나는 고학력의 소유자니까,

여전히 고마워하면서, 여전히 서로 고마워들하면서, 그동안 쓴 시들이 소풍날 깡통넥타와 같다는 거

어릴 적 소풍가서 먹다 잊은 복숭아 깡통넥타를

나는 아마 열매 맺지 못할 복숭아나무 가지 사이에 끼워놓았나 보다. 바람이 불고 깡통 구멍이 녹슬어가고 파리인지 벌인지 모를 것이 한밤에도 붕붕거리고,

그것은 너와 나의 어린 시절이 작고 부드러운 입술을 대어보았던 곳, 그 진실한 가짜 맛

그러다가 나는 문득 시작해놓은 시가 있으며

어떤 이야기가,

어떤 인생이,

어떤 시작이

아름답게 시작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쓰러진 흰 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생각해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 두 시간 정도 걸어가야 이마에 겨우 땀이 맺힐 정도의 날씨가 되면 봄 소풍을 갔었지요. 전날 가게에 들러 소풍에 가서 먹을 과자와 음료수를 샀어요. 어머니는 제게 삼천 원을 주셨던 것 같아요. 초코파이 한 박스, 고래밥 같은 걸 샀어요. 봉봉인가 쌕쌕인가 하는 알알이 떠다니는 오렌지주스도 샀어요. 바나나우유를 산 적도 있었고, 물론 복숭아 넥타를 산 적도 있었지요. 식어서 맛이 맹맹해진 음료수를 마시다가 혀끝으로 그 알루미늄 캔의 구멍을 더듬어보던 기억이 나네요. 힘을 주면 베일 것 같던 그 느낌은 여전한데, 벌써 30년 전의 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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