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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30> 동서분당(東西分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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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30> 동서분당(東西分黨)

입력
2010.04.13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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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년(선조 8)에 동인과 서인이 갈렸다. 이준경이 붕당이 갈려 당쟁이 일어날 것을 예언한 지 3년만의 일이었다. 분당의 꼬투리는 이조정랑(吏曹正郞) 자리를 둘러싼 선배와 후배의 대립에서 생겼다.

이조정랑이란 어떤 자리인가? 이조와 병조에는 정5품 정랑이 네 사람, 정6품 좌랑이 네 사람 있었다. 이 중 이조정랑은 당하(堂下: 정3품 통정대부 이하)문신의 通淸權(통청권ㆍ추천권이라는 의미)과 자신의 후임을 지명할 수 있는 자대권(自代權)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시대에 재상이 독주하던 체제를 바로잡기 위해 사림파들이 쟁취한 권한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권한은 하나의 관행일 뿐 경국대전에 법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다. 관행이 제도보다 우선한 예이다.

1572년(선조 5) 2월에 이조정랑 오건(吳健)은 자기의 후임으로 김효원(金孝元)을 추천했다. 자대권을 행사한 것이다. 그러나 상관인 이조참의 심의겸(心義謙)이 반대했다. 독재자인 윤원형(尹元衡)의 문객 노릇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김효원은 그의 장인 정승계(鄭承季)가 윤원형의 첩 정난정(鄭蘭貞)의 아버지 정윤겸(鄭允謙)의 조카였기 때문에, 공부를 위해 그곳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다. 심의겸이 김효원을 반대한 것은 그를 중심으로 언관권이 강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김효원은 이조정랑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심의겸계인 조정기(趙廷機)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김효원은 중망을 업고 결국은 이조정랑에 올랐다. 그런데 심의겸이 자기의 동생인 심충겸(沈忠謙)을 김효원의 후임으로 추천했다. 이번에는 김효원이 반대하고 이발(李潑)을 후임으로 추천했다.

그러자 조정 관료들이 선·후배로 갈려 서로 다투었다. 박순(朴淳) 정철(鄭澈) 정엽(鄭曄) 조헌(趙憲) 이귀(李貴) 윤두수(尹斗壽) 이산보(李山甫) 등의 선배들은 심의겸을, 허엽(許曄) 이산해(李山海) 유성룡(柳成龍) 우성전(禹性傳) 김성일(金誠一) 이원익(李元翼) 이덕형(李德馨) 등 후배들은 김효원을 지지했다. 이 때 김효원은 한양 동쪽의 건천방(乾川坊)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동인, 심의겸은 한양의 서쪽 정릉동(貞陵洞)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서인이라 했다. 동인은 이황(李滉)·조식(曺植)의 제자들이, 서인은 이이(李珥)·성혼(成渾)의 제자들이 많았다. 영남세력과 기호세력의 대결이었다. 혈연 지연 학연이 가미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당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던 이이(李珥)의 입장이 딱해졌다. 그는 당쟁을 조정하기 위해 당쟁의 장본인인 김효원을 경흥부사에, 심의겸을 개성유수로 내보냈다. 동인이 우세했기 때문에 김효원에게 더 무거운 벌을 준 것이다. 동인의 불평이 없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김효원을 삼척부사로, 심의겸은 전주부윤으로 재발령했다. 그러나 동인은 이이조차 서인으로 몰아세웠다. 이이는 당쟁을 조정하지 못한 채 관직에서 물러났다.

당쟁은 사림정치의 부산물이다. 훈구파와 싸울 때는 사림파가 뭉쳤으나, 선조 대에 이르러 훈구파가 무너지자 사림파가 자체 분열해 붕당이 생기고 붕당 간에 당쟁이 생기게 된 것이다. 동 ‧ 서 분당은 그 서곡에 불과했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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