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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11> 비운의 모던걸,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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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11> 비운의 모던걸, 나혜석

입력
2010.04.13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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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의 여성에게 '최초'는 영광이 아니라 질곡의 수식어였다.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ㆍ1896~1949). 화가로, 문학가로, 계몽운동가로, 두루 최초가 되는 이 근대 여성에게 식민의 세월은 모질었다. 강제로 이식된 근대성 앞에 조선의 전통은 대체로 무력했으나 여비(女卑)의 인습만은 강건했다. 개명했기에 오히려 불운할 수밖에 없었다. 나혜석이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은 이러했다.

"본적과 주소는 미상. 연령 53세. 신장 4척 5촌… 체격 보통. 기타 특징 없음. 착의는 헌옷에 소지품은 없음. 사인은 병사. 사망장소 시립 자혜원."(1949년 3월 14일자 대한민국 '관보' 행려사망자 광고)

잊혀진 신여성, 나혜석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수덕여관을 찾아갔다. 나혜석이 1937년부터 1943년까지 머물며 마지막 작품활동을 한 곳이다. 나혜석은 이곳을 떠나고 5년 뒤 지금의 서울 용산경찰서 자리에서 행려병자로 죽은 채 발견된다.

그러나 세기의 '모던걸'로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나혜석의 자취는 수덕여관에서 지워지고 없었다. 수덕여관은 화가 고암 이응로(1904~1989)가 기거했던 곳이기도 한데, 충청남도와 수덕사는 3년 전 이곳을 고암을 기리는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글쎄요. 이응로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은 많아도…. 옛날 어른들한테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지만 나혜석이라는 사람은 잘 모르겠네요." 사천리 주민들에게 나혜석은 낯선 인물이었다. 김덕진(52)씨는 "지금은 사찰 주변이 정비됐지만 20여년 전까지는 수덕여관이 마을에 속해 있었다"며 "그때도 나혜석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수덕여관에서 지척인 환희대로 올라갔다. 수덕사의 산내 암자인 이곳은 비구니 스님들의 거처로 1940년대 당시의 이름은 견성암이었다. 이곳은 나혜석과 더불어 조선의 대표적 신여성이었던 일엽(1896~1971) 스님이 주석한 곳이다. 나혜석은 출가 전 시인ㆍ수필가였던 일엽 스님과 교분이 깊었는데, 세사에 지친 나혜석은 그를 따라 불가에 귀의하려 했었다. 그러나 당대의 선지식이었던 만공 스님은 일엽 스님과 달리 나혜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저희도 나혜석 선생 얘기는 별로 듣지 못했어요. 일엽 스님은 요즘 말로 참 '쿨'한 분이셨다고 해요. 속세의 인연을 칼로 베듯 끊어버리고 불가에 귀의하셨다고…. 반면 나혜석 선생은 그렇지 못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환희대 경완 스님이 일엽 스님의 손상좌인 월송 스님으로부터 들어 어렵게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다. 환희대뿐 아니라 수덕사의 노장 스님들에게도 나혜석에 대한 기억은 희미했다.

망각 너머에서 되살아나는 삶

나혜석의 흔적을 찾는 일이 망각의 두께를 확인하는 일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나혜석기념사업회 유동준 회장은 "나혜석은 근현대사의 공간에서 의도적으로 외면된 인물"이라고 말했다. 자유연애와 이혼, '정조 유린 소송' 등은 오늘의 관점에서도 파격적인데 70~80년 전엔 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는 설명이다. 오늘까지 강고히 이어지고 있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나혜석의 삶은 센세이션이었으되 역사로서 기억할 만한 일은 될 수 없었다.

'의도적 망각'의 주체에는 가족들도 포함돼 있었다. 훗날 한국은행 총재의 자리에 오른 나혜석의 아들은 나혜석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둔 적이 없다"고 말했다. 1930년대에 여성이 성적 자기 결정권을 주장한 것은 시대를 너무나 앞서간 것이었고, 나혜석을 대하는 사회의 야멸친 시선은 가족들에게도 내내 상처가 됐다. 조카 나영군은 회고록에서 말년의 나혜석에 대해 이렇게 썼다. "어머니는 고모를 건넌방에 숨겼다. 아버지는 고모의 모습을 볼 때마다 화가 나는 것 같았다. 그 화는 고모가 여기저기 찾아 다니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더욱 악화됐다."

식민지의 모던걸은 가족들로부터의 냉대, 사회적 손가락질을 피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결국 폐인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예술마저 망각 속에 묻혀버린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나혜석의 문학은 조명을 받게 된다. 단편 '경희' 등은 이광수, 최남선 등의 상투성으로만 인식되던 1910년대 문학에 여성의 자의식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연 것으로 평가된다. 나혜석이 개척한 조선 유화도 식민지 시기 미술사에서 중요한 자료로 연구되고 있다.

나혜석은 또한 그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던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차례로 친일의 길로 들어설 때도 끝까지 지조를 지킨 민족운동가이기도 했다. 만년의 나혜석은 쓸쓸한 목소리로 자신의 삶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18세 때부터 20년 간을 두고 어지간히 남의 입에 오르내렸다. 즉, 우등 1등 졸업 사건, M과의 연애 사? 그와 사별 후 발광 사건, 다시 K와 연애 사건… 다 운명이다. 그러나 그 운명은 순순히 응종(應從)하면 할수록 점점 증장(增長)하여 닥쳐오는 것이다. 강하게 대하면 의외에 힘없이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 나혜석은 누구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용인군수를 지낸 부유한 집안이었다. 1913년 진명여고보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뒤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유학했다. 3ㆍ1운동에 가담했다 5개월 간 투옥됐다.

시인 최승구(1892~1917)와 사랑에 빠졌으나 그가 요절하자 친구인 김우영(1886~1958)과 1920년 결혼했다. 1921년 국내 여성 화가로는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 1927년부터 3년 간 구미 지역을 여행했으며, 1930년 파리에서 만난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 불륜 관계에 빠져 이혼당했다.

1931년 유화 '정원'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 일본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 입선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작품활동이 침체에 빠지고 개인적으로도 불우한 시간을 보냈다. 불교에 심취했으나 승려가 되지는 않았다. 1948년 12월 10일 행려병자로 사망했다. 대표 회화 작품으로 '나부'(1928) '선죽교'(1933) 등이 있으며 단편소설 '경희' '정순' 등을 남겼다.

예산=유상호기자 shy@hk.co.kr

예산=신상순기자 ssshin@hk.co.kr

■ 나혜석·김일엽·김명순 등 1세대 신여성 가부장제 저항…스캔들 그쳐 한계도

여필종부의 사회에서 신여성의 대중화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식민지 조선은 나혜석과 김일엽, 그리고 김명순(1896~1951) 등 3명의 걸출한 모던걸을 만나게 된다.

김명순은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의 모델로도 알려진 인물로, 1917년 문단에 데뷔한 뒤 시인ㆍ소설가로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가난과 복잡한 연애 사건에 시달리다 정신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들은 3ㆍ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신여성들의 본이 되는 1세대 여성 작가들이다. 공교롭게도 동갑내기인 이들 선각자들은 어떻게 서로 다른 영향을 조선의 모던걸들에게 남겼을까.

세 사람은 가부장적 질서와 남성의 횡포 등에 대해 공통으로 저항하고 있으나 방식에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이들의 작품에는 모두 가출이 주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그러나 나혜석의 작품에서 가출은 경제적 독립과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이지만, 김일엽과 김명순의 작품에서 그것은 또 다른 만남을 위한 수단이다. 이는 김일엽과 김명순의 작품에 자살이 빈번히 등장하는 반면, 나혜석은 자살을 다루지 않는 것과 맥이 통한다.

봉건의 인습을 벗고 여성으로서 자의식을 찾는 데 있어 나혜석이 김일엽과 김명순에 비해 훨신 주체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유분방한 연애 경력에 가려져 있으나, 나혜석이 절대적 사랑에 대한 낭만과 기대에서 벗어난 '홀로서기'의 선각자였던 셈이다.

나혜석이 연인 최승구를 가슴에 묻고 '작품 활동을 위한 계산적 선택'으로 김우영과 결혼한 뒤 최승구의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는 사실도, 나름의 홀로서기 방편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세 명의 선각자의 활동이 1920년대 신여성들에게 긍정적 영향만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인습과 편견에 온몸으로 맞섰지만 그것은 공적인 업적보다 스캔들의 성격이 강했다. 이들이 주창한 자유연애는 조선 모던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으나 그런 이유로 민족주의 주류 세력은 이들로부터 거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이 본격적으로 세상의 절반으로 인정받기까지 이 땅의 모던걸들은 다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 "여자도 사람이다" 예술과 삶으로 항변한 나혜석

나혜석은 여자가 인형이 아닌 사람이며, 사람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주제 하나로 자신의 예술과 삶을 관통했다. 최초의 근대 여성 화가로서의 자기 단련도, 최초의 근대 여성 작가로서의 글쓰기도, 당대에 많은 파문을 불러일으킨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과 이혼도 모두 이 주제의 구현과정이었다.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고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서도 끝내 불문에 귀의하지 않은 결기와 아무도 모르게 맞이한 비극적 최후도 이 추구의 도정이 이른 자연스러운 종막이었다.

나혜석은 언제나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의 진보가 조선 여성의 진보가 될 것이라는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다. 신여성이라는 것은 나혜석에게는 혜택이면서 한편으로는 커다란 의무였다.

여성에게도 자아가 있다는 것, 여성의 육체적 조건과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서 여성의 입장에서 공론화시켜야겠다는 것, 그것이 물의를 일으키고 욕을 먹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여성의 역사에서 의의 있는 일이라면 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근대 조선 여성으로서 나혜석의 자의식이었다.

그러한 자신의 예견과 각오대로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꾸려갔다. 예사롭지 않은 연애, 결혼, 이혼의 전 과정, 그 과정을 여성의 입장에서 공론화시킨 글쓰기, 그 행동과 글이 불러일으킨 파문, 그로 해서 받게 된 각종 비난과 불이익은 식민지 조선에서 자각한 한 사람의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장애에 부딪치고 어떤 결과를 낳는가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뛰어난 시인이었으나 병약하고 또한 본처가 있었던 애인 최승구가 죽은 뒤, 나혜석은 무난한 생활인 김우영과의 결혼을 선택했다. 식민지 최고급 관료의 아내로서의 결혼 생활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추구할 수 있는 물적 조건을 부여해 주었다.

나혜석 스스로 자신의 결혼 생활은 일(예술)과 가정을 조화롭게 꾸려 가는 신여성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예술가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고자 했다.

그러나 그렇게 신여성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현실적으로 과부하가 걸린 생활과 추구하는 예술의 분리라는 모순을 더 뼈저리게 느끼게 했고, 결국 그 괴리를 메꾸려는 몸짓이 최린과의 불륜이라는 형식으로 조선 사회의 금기를 건드리면서 그의 삶은 이혼을 계기로 절정에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재산도 분할 받지 못하고 아이에 대한 친권도 인정받지 못하였다. 교사나 의사 등의 자격증이 없이 직업 전선에 뛰어들기에는 너무 저명 인사였고, 그림이나 글로는 생계 유지가 안 되었다.

남성 권력의 행사로 아이들조차 만나보지 못하게 되면서 나혜석의 심신은 병들었다. 해방 후 '반민특위'가 열렸을 때 나혜석의 인생을 비극으로 몰아넣는 데 일조한 남자들 _김우영, 최린, 이광수_이 모두 반민법에 걸려 특위의 조사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반면 나혜석은 한 시기 여성으로서는 누구보다도 많은 혜택을 누린 셈이지만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여성이었기에 자기 세대 남성들이 누리던 숱한 기득권으로부터 배제되어 행려병자로 죽게 되었다. 그래서 그 오욕에서도 비켜 있을 수 있었다.

이상경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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