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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英 참전용사 "방어선 사수하라… 그날 육탄전 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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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英 참전용사 "방어선 사수하라… 그날 육탄전 생생"

입력
2010.04.13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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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전까지만 해도 '코리아'라는 나라를 들어본 적도 없고 '코리안'을 만난 적도 없던 20대 초반 벽안의 영국청년들이었다.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가 된 그들에게 코리아는 꿈에서도 지울 수 없는 나라가 됐다. 청춘을 던졌던 이 나라는 공포와 두려움, 혼돈, 그리고 뿌듯함이 뒤범벅된 기억으로 그들에게 각인돼 있다.

윌리암 스피크맨(83)과 데렉 갓프레이 키네(79)씨. 한국전쟁 기간 유엔(UN)군으로 참전했던 이들이 영연방 4개국(영국ㆍ캐나다ㆍ호주ㆍ뉴질랜드) 참전용사 및 가족들 200여 명과 함께 12일 한국 땅을 찾았다. 한국전쟁 60주년을 맞는 올해 '6ㆍ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초청으로 이 나라를 다시 찾은 그들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을까.

전쟁, 대혼란(Chaos) 그 자체

밀고 밀리던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던 1951년 11월4일. 왕실 스코틀랜드 수비대 제1연대(일명 블랙와치ㆍBlack Watch)의 휴전선 인근 방어선은 오전4시 중공군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수류탄 공격을 받았다. 당시 이등병이었던 스피크맨은 "말 그대로 '카오스'(chaosㆍ대혼란)상태였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후 들어 적군의 폭격은 더욱 강렬해졌고 방어진지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6시간이 넘도록 전투가 이어졌고 탄알은 떨어진 지 오래였다. 오후5시45분께부터 격렬한 육탄전이 시작됐다. 2m가 넘는 체구의 이등병 스피크맨은 남아있던 수류탄을 끌어 모아 전우 6명과 함께 적진을 향해 돌진하기로 결의했다. 스피크맨은 "주위에 있는 돌이라도 들어 부대원들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야 할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스피크맨을 포함한 병사들은 수십 개의 수류탄을 사방으로 던진 뒤 육탄전을 감행했다. 맥주병 등 잡히는 것들은 모두 공격 무기가 됐다. 10여차례의 공방으로 적의 공격은 주춤해졌지만 스피크맨은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부대원이 모두 후퇴할 때까지 방어선을 4시간 넘게 사수했다. 덕분에 수많은 전우들이 목숨을 구했다. 전우들은 그에게 '맥주병을 든 사나이(Beer Bottle Man)'라는 닉네임을 붙여줬다.

1952년 귀국한 그에게 왕실은 '빅토리아 십자훈장(Victoria Cross)'을 내렸다. 영국 최고 무공훈장이다. 왕실 기관지인 '런던 가제트'(1951년 12월28일)는 "적진의 맹렬한 포화 공격과 부상 때에도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를 보여준 사병 스피크맨의 용맹은 아무리 칭송해도 다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기에 최고 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현재 그는 한국전쟁 빅토리아 수훈자 중 유일한 생존자이다.

애끊는 형제애

데렉 키네는 한국전쟁에서 형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1950년 8월 자원 입대했다. 왕립 노섬벌랜드 부대 소총수로 배치된 그는 임진강 전투 마지막 날인 1951년 4월25일 중공군에 생포됐다. 포로기간 심한 매질과 고문이 이어졌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쥐들이 들끓는 동굴에 한달 가량 갇혀 있기도 했다. 키네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라며 몸서리를 쳤다. 휴전 뒤인 1953년 8월 판문점에서 포로교환으로 풀려날 때까지 온갖 고문과 살해 협박에 시달렸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내가 꺾이면 다른 전쟁포로 전우들의 사기가 죽는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런던 가제트는 '조지 훈장(George Cross)'을 받은 그에게 '그의 저항과 결기는 직급에 관계없이 그를 알게 된 모든 병사들에게 귀감이 되었다(1954년 4월13일)'고 기록했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총리로부터 "세상에서 내가 아는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전쟁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생채기를 남겼다. 갇힌 공간에서는 심한 악취가 나는 듯한 환상과 후유증에 시달려 아직까지도 치료를 받는 중이다. 입대 목적이던 형의 시신도 결국 찾지 못했다. "평양 남부에서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끝내 유해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는 그의 눈가엔 물기가 어려있었다. 6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들에게 한국전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한국 발전에 이바지 뿌듯

청춘의 피와 땀이 어린 한국땅을 다시 찾은 이들의 얼굴에는 흐뭇함이 묻어났다. 스피크맨은 "우리가 이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생각에 뿌듯하다"고 했고 손자 두 명과 함께 온 키네는 "열심히 싸워 이룬 것을 손자들에게 자랑할 수 있어 무엇보다 기쁘다"고 감격스러워했다.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기적을 이룬 한국인에 공을 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희 유엔군은 조금의 도움을 준 것뿐입니다. 씨앗을 뿌리고 노력한 한국인들이 (발전을)스스로 이룬 것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영연방 4개국에서 9만4,000여 명이 참전해 사망자 1,750여 명을 포함, 8,100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특히 중공군의 대대적 공세가 있었던 '임진강 전투'에서는 여단 병력의 4분의 1가량이 전사하기도 했다.

이성기 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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