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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손-로댕'전 30일 개막/ 꿈틀댈 듯한 석고상들…로댕의 예술혼은 살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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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손-로댕'전 30일 개막/ 꿈틀댈 듯한 석고상들…로댕의 예술혼은 살아있었다

입력
2010.04.12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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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뫼동·파리 로댕 미술관을 찾아

차가운 대리석, 청동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조각의 새로운 시대를 활짝 열었던 오귀스트 로댕(1840~1917). 30일 한국일보 주최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하는 국내 최초의 로댕 회고전 '신의 손_로댕'을 앞두고 그의 숨결을 느껴보고자 프랑스를 찾았다. 프랑스에는 파리, 그리고 파리 근교의 뫼동(Meudon) 두 곳에 로댕의 이름을 단 미술관이 있다. 먼저 교외선에 몸을 실었다. 뫼동의 언덕 위에 자리잡은 브리앙 빌라는 로댕이 1893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 넘게 살았던 곳으로, 그가 오직 창작에만 몰두한 작업 공간이었다.

로댕 무덤 위의 '생각하는 사람'

벨을 누르자 잠겨있던 철문이 열리면서 어마어마하게 넓은 정원이 눈 앞에 펼쳐졌다. 관리인은 "한국에서 커다란 로댕 전시회가 열린다면서요"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뫼동의 미술관은 4~9월 주말 오후에만 문을 여는데, 요즘은 전시관 건물을 보수하고 있어 그나마도 관람이 제한되고 있다.

로댕의 집 내부는 그가 생전에 엄청난 성공을 거둔 작가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소박했다. 1층 식당의 나무식탁 위에는 로댕이 사용하던 식기가 그대로 놓여있고, 통유리를 통해 푸른 자연이 내려다보이는 작업실에는 로댕의 손길이 닿았던 석고 조각들과 로댕의 수집품들이 전시돼있다. 작은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2층 침실 벽에는 말년의 로댕이 마음을 기댔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이 걸려있다.

집을 나가 정원을 걸으면 자연스레 로댕의 무덤에 닿는다. 묘비에 로댕과 그의 부인 로즈 뵈레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있다. 로댕은 가난한 무명 작가이던 24세 때 재봉사로 일하던 뵈레와 만나 아들까지 얻었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이후 성공가도를 달린 로댕의 곁에는 제자 카미유 클로델을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고, 로댕은 일흔이 넘어서야 뵈레에게 돌아갔다. 그들이 만난 지 53년 만인 1917년, 뫼동에서는 두 사람의 결혼식에 이어 두 번의 장례식이 차례로 열렸다.

로댕의 무덤 위에는 인간의 고뇌를 함축한 그의 대표작 '생각하는 사람'이 육중하게 앉아있다. 로댕은 땅 속에 누워서도 자신의 피조물과 마주하고 있을까. 이유를 알 수 없는 무게에 눌려 쉽게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생명력으로 꿈틀대는 석고 조각

묘지 뒤로 보이는 것은 로댕의 석고 작품들을 모아놓은 전시관이다. 로댕은 1900년 파리 알마 광장의 전시관에서 자신의 대표작을 모아 대규모 개인전을 연 뒤, 뫼동 집의 정원에 알마 전시관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지옥문' '생각하는 사람' '빅토르 위고' '발자크' '칼레의 시민'…. 수많은 명작들의 기본 틀이 된 석고 조각들은 금세라도 살아 움직일 듯 생명력이 넘친다.

"우리를 응시하는 듯한 현란한 백색의 조각들이 모여 있는 이 넓고 밝은 홀에서 우리는 묘한 힘을 느낀다오. 우리는 이 수백 개의 생명체가 실은 하나의 생명체이며, 하나의 힘, 하나의 의지의 울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지한다오. 여기에는 모든 것이 있어요."

로댕의 비서로 일했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902년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뫼동 작업실의 감동을 이렇게 표현했다.

석고 작업은 로댕에게 단순히 청동이나 대리석 작품을 위한 전 단계가 아니었다. 조각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진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석고 작업을 통해 변형과 조합, 해체를 끊임없이 실험했다. 석고는 그에게 수많은 가능성을 향해 열려있는 재료였던 것이다. 전시관 내에는 로댕의 작업 과정을 증명하듯 손, 팔, 다리 등 온갖 신체 부분 조각들이 반복해서 늘어서있다.

여전히 살아숨쉬는 로댕의 예술혼

뫼동이 로댕의 작업장이었다면, 파리의 비롱 호텔은 그가 세상과 교류하며 사회적 명성을 쌓았던 곳이다. 로댕은 1908년 릴케의 추천으로 18세기에 지어진 저택과 아름다운 정원으로 이뤄진 비롱 호텔에 찾아든다. 당시 비롱 호텔에는 릴케를 포함해 장 콕토, 앙리 마티스, 이사도라 던컨 등의 예술가들이 세들어 있었다. 한눈에 이곳에 반한 로댕은 여러 개의 방을 빌렸다. 그리고 컬렉터, 화상, 평론가 등을 초청해 사교의 공간으로 삼았다.

1911년 프랑스 정부가 이곳을 철거하려 하자 로댕은 비롱 호텔을 로댕미술관으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자신의 모든 작품과 소장품을 국가에 기증했다. 로댕의 대표작 300여 점이 전시된 로댕미술관은 지금은 한 해 70만명의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세계적 명소가 되었다. 로댕은 여전히 이 공간을 통해 세계인들과 소통하고 있는 셈이다.

오래된 저택 안에는 '신의 손' '입맞춤' '청동시대' 등이 있고, 정원 곳곳에 '지옥문' '생각하는 사람' '발자크' '빅토르 위고' 등의 청동 작품들이 자리하고 있다. 뮤즈의 속삭임을 듣고 있는 대문호의 영혼을 표현한 '빅토르 위고' 앞에서 한 관객이 깊은 생각에 빠져있?모습을 본 미술관 홍보담당자는 "저 작품은 곧 미술관을 떠나 서울로 여행 간다"고 귀띔했다. 이제 18일 후면 로댕의 뜨거운 예술혼이 우리 앞으로 온다.

■ 한국 첫 회고전 기획한 로댕미술관 큐레이터 나딘느 레니

파리 로댕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나딘느 레니는 한국에서 열리는 로댕의 첫 회고전에 대해 흥분과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직접 '신의 손_로댕' 전의 큐레이터를 맡은 레니는 "가장 중요하고 아끼는 작품들만을 골라 한국으로 보낸다"고 말했다.

특히 '신의 손'의 경우 지금껏 단 한번도 밖으로 내보낸 적이 없는, 로댕미술관의 핵심 작품이다. "'신의 손'은 진흙을 빚어 인간을 창조하는 신의 모습을 표현하는 동시에 창조자로서의 로댕 자신을 상징하는 이중적 의미의 작품입니다. 로댕을 가장 잘 설명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에서 고민 끝에 출품을 결정했습니다."

그가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다양성이다. 청동이나 대리석 작품뿐 아니라 로댕의 작업 과정과 실험성을 느낄 수 있는 석고 작품, 과감한 누드 데생 등을 포함시켰다.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소형 작품부터 대작에 이르기까지 크기도 다양하다. 또 연대기가 아닌 주제별 구성을 통해 로댕의 예술 세계를 깊이있게 조명한다. 그는 "로댕이 어떻게 인물을 표현했는지, 그 형상들이 어떻게 변형되고 조화를 이루는지, 로댕이 생각한 에로티시즘은 어떤 것이었는지 등을 두루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로댕이 '근대 조각의 시조'로 불리는 이유에 대해 "주제에 대한 접근, 조각의 기법 등 모든 면에서 전통적 관습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로댕은 대상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을 표현해냈습니다. 신체 부분을 강조하거나 삭제하는 과감한 방식을 택해 본질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요. 또 작품을 계속 변형해가며 재창조한 것도 혁신적이었습니다."

레니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로댕의 작품으로 '신들의 전령, 아이리스'를 꼽았다. 다리를 옆으로 뻗은 채 점프하고 있는 여성의 몸을 포착한 이 작품에서 그는 "로댕의 대담성과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뫼동^파리= 글·사진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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