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松江 鄭澈,1536~93)은 임진왜란 앞뒤 시대에 활동한 문신으로, 한국 시가문학사를 빛낸 대표적 문인이다.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사미인곡(思美人曲>'등 4편의 가사(歌辭)와 단가[時調] 74수를 남긴 조선조 제일의 시인으로, 임억령·김인후·기대승의 성산가단(星山歌壇)에서 배우고, 호남가단(湖南歌壇)의 중심이 된 문인이다. 특히 그의 국문 시가는 우리말의 구사와 조어에서 뛰어나서 "악보(樂譜) 가운데 으뜸 노래[絶調]로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 "에 비견되고(홍만종; <순오지(旬五志)> ), 혹은 "동방의 <이소(離騷)> "(김춘택; <북헌집(北軒集)> ) 로 굴원(屈原)에 비견된 평가를 받았다. 북헌집(北軒集)> 이소(離騷)> 순오지(旬五志)> 출사표(出師表)>
특히 '관동별곡'은 송강이 45살 되던 해(1580)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관동팔경을 구경하고 쓴 기행가사로, 294구로 쓴 장가이다.
"소향로 대향로봉 눈 아래 굽어보며/ 정양사 뒤 진헐대에 다시 올라 앉아보니
금강산 참 모습이 여기서는 다 뵈는구나. /어와 조물주가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날거든 뛰지 말거나 섰거든 솟지 말거나 / 부용을 꽂아놓은 듯 백옥을 묶어놓은 듯
동해를 박차는 듯 북극성을 괴고 있는 듯/ 높을시고 망고대 외로울 사 혈망봉이
하늘에 치밀어 무슨 일을 아뢰려고/ 천만 겁 지나도록 굽힐 줄 모르는가
아아 너로구나 너 같은 것이 또 있는가."(<관동별곡> 일부, 풀어쓰기) 관동별곡>
금강산의 정맥(正脈)에 자리 잡아 볕 바른 곳 정양사(正陽寺)는 내금강의 40여 개 봉우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최고 전망으로 이름난 곳. 이 절 뒤 진헐대에 올라 앉아 금강산을 내려다보며 읊어낸 송강의 노래는 "이태백(李太白)이 다시 나서 고쳐 의론하더라도 여산(廬山)이 여기보다 낫단 말은 못하리라"고 했다. 겸제 정선(謙齋鄭敾, 1676-1759)이 1734년에 그렸다는 '금강전도'(국보 제217호)는 그림의 왼쪽에 무성한 숲이 어우러진 정양사와 진헐대를 배치하여 '관동별곡'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그림 위에 붙인 제화시(題畵詩)에는 "만 이천 봉 개골산을 누가 참모습 그릴 건가?… 몇 송이 연꽃 해맑은 자태 드러내고 솔과 잣나무 숲에 절간은 가려있네"라 하였다.(유준영;<금강전도> 해설 참조) 금강전도>
송강의 이 기행가사 또한 그보다 25년 앞서 나온 백광홍(白光弘,1522-56)의 '관서별곡'에서 영향을 받았고, 우리말을 맘대로 주물러서 구사한 솜씨는 그가 젊어서부터 익힌 호남가단의 시적 전통에 이어져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무거울까"('훈민가 제16')나, "한 잔 먹세거녀, 또 한 잔 먹세거녀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세거녀..."('장진주사(將進酒詞)') 등 시조에서 더욱 빛났다.
보덕굴 벼랑 밑으로 이영로 박사를 따라 천연기념물 제232호 금강국수나무꽃을 찾던 내금강 기행을 떠올리며, 내외금강 길이 다시 열릴 날을 손꼽는다.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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