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4월 4일 나치 독일의 심장부인 제국 보안중앙국에 한 통의 전보가 날아왔다.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350㎞ 떨어진 스몰렌스크에 주둔 중이던 친위대 장교가 보낸 것이었다. 스몰렌스크에서 멀지 않은 카틴(Katyn)숲에서 폴란드 장교와 병사 등 4,100여 명의 시신이 묻힌 집단무덤이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점토질의 흙 속에 묻혀 썩지 않은 시신들 중에는 장성과 고위 참모장교, 교수, 변호사, 주교 등 성직자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3년 전 폴란드를 침공한 소련군이 자행한 카틴숲 학살사건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 이 전보 내용은 즉각 괴벨스 선전상에게 전달됐다. 그는 소련을 압박하기 위해 폴란드 언론인과 성직자, 중립국 의사 등이 현지를 방문하도록 조치했다. 부검 결과 희생자들은 대부분 결박 당한 상태에서 뒷머리에 권총을 맞고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일부는 총검에 찔려 죽었는데, 소련군만이 사용하던 것이었다. 43년 9월 80여장의 사진이 포함된 275쪽의 보고서가 발간돼 미국 영국 등의 정부 대표 및 주요 신문사에 발송됐다. 하지만 소련은 나치의 짓이라고 발뺌했고, 미국과 영국은 연합군의 유지를 위해 눈을 감아 버렸다.
■ 카틴숲 학살사건은 1989년 구 소련 붕괴 후 고르바초프의 진상조사로 그 실체가 드러났다. 스탈린의 지시로 1940년 봄 소련 비밀경찰 NKVD(KGB의 전신)가 폴란드인 전쟁포로와 지식인, 예술가, 성직자 등 2만2,000여 명을 살해한 뒤 암매장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폴란드가 독립국으로 일어설 수 없도록 엘리트들의 씨를 말리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9년 불가침조약을 맺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은 재빠르게 폴란드 동부지역을 점령한 뒤 소련의 지배에 저항할 수 없도록 엘리트 집단을 조기에 제거한 것이다.
■ 약소민족의 해방을 부르짖은 스탈린이 히틀러의 충실한 협조자가 돼 폴란드를 침공한 것은 아이러니다. 나치 독일이 41년 총구를 소련으로 돌리자, 적대시하던 서방국가들과 손을 잡은 것도 마찬가지다. 스탈린 이래 소련은 약소민족에 대해 어느 제국주의 국가보다 가혹했다. 사회주의의 종주국이자 약소민족의 해방자인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편의적 논리였다. 러시아는 지금도 카틴숲 학살이 국가적으로 책임질 사건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체첸 등의 독립열기를 무자비한 폭력으로 억누르고 중앙아시아에 친러 정부를 세우려는 정치공작도 여전하다. 70년 전 카틴숲의 비극은 현재진행형이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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