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발행ㆍ408쪽ㆍ1만2,000원
소설가 박범신(64)씨가 장편 <고산자> 이후 반년 만에 펴낸 새 장편이다. 칠순의 노시인 이적요, 그의 제자인 30대 후반의 소설가 서지우, 열일곱 살 여고생 한은교가 주인공이다. 고산자>
각별했던 사제가 동시에 은교에게 애정을 품으면서 벌어지는 치정을 다룬 연애소설이면서, 평생 시인으로 고결한 이미지를 지켜온 이적요가 말년의 애욕에 몸부림치며 자신의 삶과 문학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모습을 그린 예술가소설로도 읽히는 등 다면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소설은 이적요가 병들어 죽으면서 후배 시인이자 변호사인 Q에게 남긴 노트의 내용과, 이적요에 앞서 교통사고로 죽은 서지우가 은교에게 맡긴 일기를 번갈아 보여주며 진행된다.
이적요는 민주화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경력, 세상에 드러나길 꺼리면서 시 이외의 잡문은 일절 발표하지 않는 작품활동으로 세간의 존경을 받고 있는 시인. 하지만 이는 이적요가 남의 눈을 철저히 의식하며 꾸려온 가식적 삶일 뿐이다. "모름지기 뛰어난 시인은, 죽은 다음에도 살아남는 자이며, 그러므로 죽은 다음에도 살아남도록 나는 살아왔다."(396쪽)
이적요는 자신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문하생 서지우의 이름으로 통속소설을 발표, 제자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든다. 이적요는 그렇게 제자의 이름을 팔아 문학적 욕구를 해소하고, 서지우는 문재(文才)가 없다며 자신을 괄시하는 스승에게서 얻은 인기 작가의 허명에 집착한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하던 사제는 은교의 등장으로 서서히 연적 관계로 변해간다.
소설은 은교를 만나면서 새로운 정신과 육체로 거듭나고자 하는 노시인의 덧없고도 강렬한 욕망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잠복했던 애증이 한 여자를 두고 상대를 파멸시키려는 광기로 치달아가는 과정 역시 압도적 필치로 서술됐다.
올해로 등단 37년을 맞는 작가 박씨의 필력은 원고지 900매 분량을 일말의 지루함 없이 단번에 읽게 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은자(隱者)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스스로를 우상화해온 이적요의 생애는 문단, 나아가 지식인 사회에 대한 작가의 통렬한 야유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은 박씨가 개인 블로그에 연재했고, 불과 한 달 반 만에 집필을 마쳤다는 점에서도 화제가 됐다. 그는 "1993년 절필 선언을 하며 신문 연재를 중단했던 <외등> 이후 17년 만에 쓴 연애소설이자, <촐라체> <고산자> 에 이은 '갈망의 3부작'의 완결판"이라며 "내 안에 있는 다양한 층위의 욕망을 통틀어 <은교> 에 투영했다"고 말했다. 이 소설은 국내 문학작품 최초로 전자책으로도 동시 출간, 인터넷 교보문고(www.kyobobook.co.kr)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은교> 고산자> 촐라체> 외등>
이훈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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