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 일행이 바르샤바에서 러시아제 Tu-154기에 오른 시간은 대략 10일 오전 10시(현지시간) 전후로 추정된다. 이들은 정오께로 예정된 러시아 스몰렌스크 인근 카틴 숲 학살사건 추모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전용기에 올라 약 한 시간 정도 비행 후 스몰렌스크 공항 상공에 도착했다.
오전 10시50분께 스몰렌스크 공항 관제소에 착륙허가를 요청한 사고기는 갑자기 연료를 버리기 시작했다고 러시아 언론들이 보도했다. 보통 항공유를 버리는 이유는 착륙중량을 줄이기 위한 것으로 기체 이상으로 예정보다 빨리 착륙해야 할 경우에 이뤄진다. 이 때문에 "낡은 기종인 사고기가 안개와 상관없이 기체 이상을 발견, 비상착륙을 시도한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일단 조종사 착오 보다 사고뭉치 러시아제 항공기의 고장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영 BBC는 "2008년에도 사고기는 조종장치 이상으로 출발이 지연되는 등 문제를 일으켰었다"며 기체 이상설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공항 관제사와의 교신 과정에서 기체 이상 여부가 보고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사고기가 네차례 착륙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관제사가 안개를 이유로 착륙하지 말 것을 조종사에게 지시한 후 인근 벨라루스 민스크 공항으로 회항을 유도했다"는 것이 러시아 당국의 주장이다. 하지만 사고기는 관제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무리한 착륙을 감행, 급기야 안개에 싸인 숲속으로 추락했다.
러시아 TV방송들은 "앞서 최소한 한 대의 항공기가 관제사의 지시로 회항을 했는데도 사고기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며 의문을 던졌다. 기체이상이 없는데도 무모한 착륙을 시도했다면 조종사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부분이다. 알렉산더 알류신 러시아 공군 중장은 "관제탑이 고도를 올리고 수평비행을 하라고 지시했으나 조종사가 따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최악 시나리오인 승무원 연루 테러 가능성은 러시아와 폴란드 관계 등에 엄청난 파장을 미칠 수 있다. 러시아 당국은 "불안전 착륙을 하면서 하강속도를 늦추지 않은 이유 규명에 주력하겠다"는 입장이다. 또 "블랙박스 회수로 의혹해소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며 파문 확산을 경계했다.
양홍주 기자 yanghong@hk.co.kr
■ 러시아제 Tu-154 여객기, 항공사고 66건 악명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 등의 목숨을 앗아간 기종은 20년 된 러시아제 투폴레프(Tu)-154 여객기였다. 구 소련 시절 제작돼 1968년 첫 취항했다가 20년 전 생산이 중단됐으나, 아직 200여대가 운항이다.
레스제크 밀러 전 폴란드 총리는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정부 사용 기종을 빨리 바꿔야 한다고 늘 지적했다"며 "이런 재앙이 올 줄 알았다"고 한탄했다. 폴란드 정부는 예산문제로 기종 교체를 미뤄온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이 기종은 숱한 항공 사고를 낳은 '문제 기종'이다. 지금까지 Tu-154와 관련된 사고는 66건으로, 1994년 이후 100명 안팎이 사망한 대형 사고만 16건에 달했다. 지난해 7월에도 이란에서 168명이 사망한 추락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번 항공기 운항을 맡은 '아비아코 팩토리'의 알렉세이 구세프 국장은 "전용기를 지난해 정비하고 수리했다"며 "절대 기체 결함으로 이번 사고가 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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