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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페일 세이프(Fail Safe)

입력
2010.04.1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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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마하 핵전략사령부의 레이더에 미확인 물체가 잡힌다. 유럽에서 미 대륙 북쪽으로 날아오는 것이었다. 그 시각 미 전략폭격기 6대는 매일 그랬던 것처럼 알래스카와 소련의 접경의 '안전 지점'(fail-safe point)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전략폭격기들은 그 지점에 다다랐을 때 대기명령을 받는다. 미확인 비행기가 별 게 아닌 것으로 판명되자, 사령부는 귀환명령을 보낸다. 그러나 컴퓨터 오류로 전략폭격기의 '페일 세이프 박스'(fail-safe box)에는 공격명령이 전달된다. 편대장은 전략사령부와 연락을 시도하나 소련의 전파 방해로 실패한다. 편대장은 고민 끝에 절차에 따라 박스를 끄고 "모스크바를 때린다"는 지시를 편대에 내린다. 조종사들은 소련 영토로 들어간 뒤에는 "소련에 의해 조작될 수 있는 구두명령은 무시하라"는 훈련을 받은 대로 사령부의 구두 귀환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불의의 실수도 전쟁의 큰 원인

미 대통령은 소련 서기장에 긴급하게 연락, "의도하지 않은 실수"라고 알린다. 미 전략폭격기들을 격추시키기 위한 약점들도 알려준다. 그럼에도 고도의 성능을 갖춘 전략폭격기 6대 중 1대가 소련 전투기들의 방어망을 뚫고 모스크바에 다다른다. 미 대통령은 핵전쟁을 막기 위해 제안한다. 뉴욕에 동일한 핵폭탄을 투하하겠다고. 그리고 영부인이 방문하고 있고 비극적 명령을 수행하는 폭격기 조종사의 아내와 두 아들이 살고 있는 뉴욕에 핵폭탄이 투하된다. 물론 모스크바도 파괴된다.

이 섬뜩한 내용은 유진 버딕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시드니 루멧 감독의 1964년 작 '페일 세이프'(Fail Safe)의 줄거리다. 쿠바 미사일위기(1962년)로 핵전쟁 공포가 팽배해 있던 시기에 개봉된 이 영화는 미국인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48년 전의 얘기를 다시 꺼낸 이유는 그 메시지와 천안함 침몰이 겹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속초함이 북상하는 미확인 물체를 향해 포격을 가했을 때 북한의 해안포들이 대응하고 우리가 다시 반격했다면 어찌 됐을까.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북한과의 국력 차이가 현격히 벌어지고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 컴퓨터 게임처럼 폭격을 해대며 승리하는 것을 보면서 전쟁이 벌어지면 무조건 우리가 이긴다는 낙관론이 생겼다. 물론 이길 것이다. 그러나 천안함 침몰이라는 단 한 사건에서 발생한 그 많은 주검에서 전쟁의 참화를 가늠할 수 있다. 미국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등 다른 나라에서 벌이는 전쟁과는 다르다. 우리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다. 우리가 쌓아 올린 빌딩, 공장, 아파트 그리고 수많은 민간인들이 화염 속에 스러져갈 것이다. 연구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개전 초기에 적게는 150만 명, 많게는 300만~400만 명이 희생된다고 한다.

전쟁 억지력은 강력한 국방력에서 나옴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남북관계를 군사적 차원만이 아닌 전략적 차원에서도 다뤄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우발적인 상황이 전쟁으로 악화하지 않도록 하는 위기관리를 해야 한다.

남북 간에도 유연안전성 필요

그런 점에서 서울과 평양 간에 핫라인조차 없는 지금의 상황은 대단히 위험하다. 핵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던 쿠바미사일 위기 이후 미소 지도자 간에 핫라인이 설치됐고 레이건 정부 시절 미소 군비경쟁의 와중에서도 막후 대화는 이루어졌다.

우리는 지금 북핵을 포기시키기 위해 봉쇄작전을 펼치고 있다. 필요한 조치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북핵 폐기 노력도 궁극적으로는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다. 핫라인이나 막후대화, 그리고 대북 지렛대가 될 수 있는 인도적 지원이나 경제협력도 한반도 안정과 위기 관리를 위한 또 다른 조치일 수 있다. 노동문제에서 유연안전성이 있듯 남북관계에서도 유연안전성은 필요하다.

이영성 편집국 부국장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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