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천호균 (주)쌈지 전 대표의 목소리는 깊은 회한에 잠겨있었다. 토종 대표 패션잡화브랜드 쌈지가 최종 부도 처리된 7일 어렵게 연결된 전화통화에서 그는 '죄송하다' 소리를 여러 번 했다. "(부도로 인해)정신적 물질적으로 큰 상처를 입은 직원들과 주주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보상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숙제"라고도 덧붙였다. 물론 천 전 대표에게는 민형사상 어떠한 보상책임도 없다. 오히려 그도 쌈지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못 받은 매각대금을 허공에 날려야 하는 처지다. 국내 패션업계에 문화예술마케팅을 처음 도입하고 신진 아티스트들에게 창작공간을 지원하는 등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그가 자식처럼 키운 브랜드의 도산을 속수무책 지켜봐야 하는 심정은 얼마나 참담할 건가.
천 전 대표가 쌈지 경영권을 매각한 것은 지난해 8월이었다. 쌈지의 국내 성공을 발판으로 2001년 프랑스 잡화 브랜드 마틴싯봉을 인수하며 해외시장에 진출하고, 영화제작 및 엔터테인먼트 사업에도 뛰어드는 등 정력적인 사업확장을 펼쳤으나 수백억원을 쏟아 부은 해외사업이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자금압박에 시달렸다. 경영능력의 한계를 느끼면서 회사 매각을 고려할 때 마침 법률자문회사로부터 현 최대주주인 양진수ㆍ양철수(가명) 형제를 소개받았다. '에너지사업을 하는 열정적인 젊은 기업인'이라는 추천에 매각을 결심했다.
처음 한 달은 회사 운영이 활기를 찾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후의 행태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11월부터는 백화점 매장들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위조 어음이 나돈다는 소문이 이어졌다. '사기'라는 글자가 뇌리를 스치기 시작했다.
쌈지에서 근무하던 한 직원의 말도 다르지 않다. "청춘을 쌈지에 바쳤다"는 이 직원은 "최대주주가 임명한 신임대표가 9월만 해도 쌈지를 새롭게 중흥시키겠다며 직원들을 독려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꿈도 못 꿨다"고 했다. 그러나 10월 중순부터 사채업자가 회사에 나타나 회장실을 점거하고 직원들의 임금 체불이 이어졌으며 최대주주가 회사인감을 가져가 재경팀과 총무팀은 회사 내 자금의 흐름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태가 이어졌다. 12월에는 600명에 달하던 회사 조직원이 거의 다 떠난 상태가 됐다. 회사가 이 지경이 되는 동안 최대주주들은 회사에 단 한번도 출근하지 않았고 신임대표 역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최대주주가 경영권 확보 직후인 10월 증자를 통해 100억원대의 자금을 확보하고 회사 이름으로 여기저기서 수백억원대의 돈을 꿔 달아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원들은 현재 밀린 임금과 퇴직금을 돌려받기 위해 노무법인 세종을 통해 고소장을 접수시킨 상태다.
쌈지의 부도가 일확천금을 노린 기업사냥꾼의 의도된 수순인지 여부는 아직 확실치 않다. 하지만 이 사태로 인해 수백명의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명망 있는 코스닥 등록기업에 투자했던 투자자들이 돈을 날렸으며, 패션과 문화의 접목을 통해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했던 25년 역사의 토종 패션잡화브랜드가 허망하게 스러졌다.
잘 키운 브랜드 하나가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시대에 벌어진 일이다. 책임 있는 기관의 철저한 조사가 있어야만 제 2, 제 3의 쌈지 사태를 막을 수 있다.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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