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다닌 서울연극학교는 정말 괴짜들로 가득 찬 학교였습니다. 입학식 날 교장 선생이 각 교실을 순회하신다 하여 모두 교실에 앉아 있는데 분홍색 점퍼 차림에 청바지를 입은 장발 사내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교탁 위에 털썩 올라 앉아 다리를 건들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보다못해 “야, 내려 와. 교장 선생 온다잖아!” 소리를 쳤고, 그 장발은 나를 빤히 바라다보면서 웃었습니다. “내가 교장이야.”
그분이 바로 약관 36세의 교장 선생 유덕형. 70년대 서슬 퍼런 유신시대에도 장발을 휘날리며 다녔던 괴짜 박사였습니다. 삼십대 중반에 교장을 맡은 것도 파격적이었지만, 이십대 청춘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그 젊음. 그러나 이미 그때 ‘알라망’이란 연극으로 제3세계 연극제에서 금상을 탄 연출가였고, 아버님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희곡 작품이 실려 있었던 유치진 선생이셨습니다.
유치진 선생은 입학식 날 이른 아침에 먼저 만났습니다. 부산에서 지난 밤 야간열차를 타고 올라온 저는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무작정 남산 드라마센터로 갔습니다. 꼭두새벽이라 식당이고 다방이고 문은 잠겨 있었고, 저는 갈 곳이 없어 학교 마당을 어슬렁거리고 있었지요. 그때 마당에서 빗자루 질을 하던 청소부 영감이 문득 몸을 굽혀 무언가 줍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별스런 생각 없이 다가가 물었습니다. “지금 뭐 하세요?” “응, 땅바닥에 못이 떨어져 있네. 학생들 발 안 다치려면 이거 다 주워야지.” 그래서 별 할 일도 없던 저는 청소부 영감 일을 거들어 같이 못을 주웠습니다. 그 청소부 영감님이 바로 유치진 선생이셨다는 것을 안 것은 입학한 지 한 달이 거의 다 지나갈 즈음이었습니다. 유치진 선생 특강이 있다고 해서 기다렸더니, 예의 그 청소부 영감님이 교실로 들어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날 유치진 선생 강의는 러시아의 ‘장터연극’이야기였습니다. 러시아의 젊은 연극인들이 민중 계도와 연극 운동 차원에서 장터를 떠돌며 이동 순회극단 공연을 전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연극은 관객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것, 지역 출신 학생들은 여름 방학 때 자기 고향에 돌아 가 학교에서 배운 연극을 펼치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날의 강의는 제가 연극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제공했습니다. 저는 실제 입학한 첫해 여름방학 때, 무모하게 고향 부산에 내려가 두 편의 단막극을 기획 제작 연출 출연까지 감행합니다. 그리고 쫄딱 망합니다.
학생들은 나이와 출신이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최연소 학생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입학한 장희용 군이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 연기자상을 받은 어린 프로였습니다. 학교 졸업 후 담임이셨던 오태석 선생의 모노 드라마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를 장기 공연한 친구인데 저의 유일한 단짝이었습니다. 극심한 생활고를 뒤로 한 채 1997년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경기도에서 면서기를 하다가 입학한 이문수는 국립극단 배우가 되었고, 공수 특전단 출신 조상건은 목화의 창단 배우가 되었지요. 그 둘은 당시 이미 20대 후반에 접어든 늙은 학생들이었습니다. 영화 ‘병태와 영자’ 주연배우로 유명해진 하재영, 영화 배우 겸 제작자로 활동하다 타계한 김일우, 연출가 이병훈, 극작가 오태영, 인천시립극단 창단배우 이필훈, 하나방 소극장을 운영하며 ‘바쁘다 바뻐’를 몇십 년 동안 공연한 영원한 변방 연극인 이길재, 부산 연극의 터주대감 김경화, 전주 연극의 터주대감 유영환, 한해 후배인 남편과 함께 까망 소극장을 운영하는 유연숙, 가수 최희준 선생의 아내가 된 김희련, 미국 이민 갔다고 들은 신연숙 등이 72학번 연극과 A반 학생들이었습니다.
A반 담임교수는 오태석. 후줄근한 골덴 바지 저고리를 입고 다니던 그분에게서 무얼 특별히 배운 기억은 없습니다. 1학기 내내 ‘육교상의 유모차’란 짤막한 모노드라마를 20명의 학생들이 대사 한두 줄씩 나누어 받고, 매일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숨었다가 뒹굴었다가 하면서 세월 보낸 기억밖에 없습니다. B반(담임 허규)은 ‘춘향전’을 연습하고, C반(담임 오사량)은 ‘햄릿’을 연습하는데, A반은 ‘육교상의 유모차’란 20분짜리 단막극, 그것도 출연자가 한 명뿐인 모노드라마였습니다. 내가 나누어 받은 장면은 두 줄짜리 대사가 제일 길었습니다. 그러나 72학번 A반 학생들 20명 중 절반 이상이 40여 년 가까이 한국연극 영화 현장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은 경이적인 기록으로 남을 일입니다. 두 줄짜리 대사를 화두처럼 안고 한 학기 내내 뒹굴었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명 강의들이 수두룩한 학교이기도 했습니다. 극작술 윤대성, 발음법 이원경, 발성법 및 일반 연기론 오순택…. 오순택 선생은 영화 ‘007 황금총의 사나이’에도 출연한 바 있는 할리우드 배우인데, 귀국하여 영화배우 윤정희와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그 작품 연출자가 아마 오태?선생이셨지요. 오순택 선생은 제가 여름방학 때 고향 부산에 가서 연극을 하겠다고 하니까 연기 레슨을 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2006년, 제가 국립극단 예술감독 재임시 쉴러의 ‘떼도적’에 악한 동생 프란츠 역을 맡아 주셨습니다. 이때 연출 자가 저였으니, 선생과 제자가 34년 만에 배우와 연출가로 다시 만난 셈입니다.
이외에도 미학강좌가 개설되어 있었는데, 이 강좌를 통해 세계미술사 강의를 들었습니다. ‘정신도야술’이란 강좌는 엄청난 신체훈련을 동반한 수업이었고, 봉산탈춤을 추어야 했습니다. 이원경 선생의 발음법은 악명이 높았습니다. 찍어 읽기, 끊어 읽기, 음역 등을 체크해 나가다 보면 대본이 새까맣게 화술을 위한 악보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오태영이란 늙은 학생이 내게 다가와 극작 동인을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그는 동국대 생물학과를 중퇴한 극작가 지망생이었습니다. 윤대성 선생이 극작술 수업 시간에 내가 제출한 ‘촛불’이란 원고지 30매 분량의 짧은 촌극을 잘 쓴 작품으로 선택해서 수업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필 그 시간을 빼 먹고 별도의 연극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업을 잘 듣지 않는 불량 학생의 글을 뽑아준 극작가 윤대성 선생은 그 후 저와 특별한 인연을 이어갑니다. 그 이듬해 제가 고향 부산 무아음악실에서 일반 소극장 무대 배우로 데뷔한 작품이 윤대성 작 이윤택 출연 연출 ‘출발’이었고, 1986년 연희단 거리패 창단공연이자 부산 가마골소극장 개관 공연이 윤대성 작 유덕형 지도 연출의 ‘미친 동물의 역사’를 재구성한 ‘죽음의 푸가’(윤대성 원작 이윤택 재구성 연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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