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등 고대국가의 지배자들이 권위의 상징으로 사용한 관은 보통 순금이나 금동의 관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라금관의 경우 순금관이나 금동관의 형태가 독특해서 그것이 실용의 관인지, 장례용인지, 의례시 사용한 것인지 아직 그 용도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순은으로 만든 은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물론 출토 예가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금관에 가려 은관의 존재가 부각되지 못한 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완벽한 형태의 은관은 경주 평지에 분포하고 있는 신라무덤 가운데 98호분 즉 발굴조사 후 황남대총으로 불리게 된 것의 남쪽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 유일하다.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황남대총은 부부의 무덤임이 분명하지만 아직까지 그 무덤의 주인공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부부무덤 가운데 남쪽의 무덤이 남자의 무덤으로 신라특유의 금관대신 금관형태인 금동관 6점이 출토되기도 했지만 유일하게 은관도 1점 출토되었고 이 은관과 비슷한 형태의 금동관도 1점 출토되었다.
이 은관은 출토 당시 세상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신라금관 형태의 금동관 1점은 무덤 주인공의 머리에 착용된 상태로 출토되었지만 이 은관은 부장품으로 출토되었고 형태도 거의 완전하다. 이러한 형태의 은제관은 신라는 물론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출토 보고된 바 없어 최초의 출토 예로 기록된다. 황남대총이 발굴조사 된 지도 40여 년에 이르고 있고 그 동안 수많은 삼국시대 무덤들이 발굴되었지만 아직까지 이러한 형태의 은관이 더 출토된 바 없다.
이 관은 신라 금관과 비교하면 한마디로 매우 실용적인 관이다. 금관의 화려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지만 머리에 쓰고 활동하기 불편해 실용성이 의문시 된다. 하지만 이 은관은 단순하면서도 권위를 갖추고 있다. 구체적인 모습을 보면 머리 둘레에 맞게 만든 관태인 대륜(帶輪)에 세워진 입식(立飾) 장식은 추상적인 새의 깃털을 연상케 하는데 이것은 무덤의 주인공이 알타이 시베리아 출신의 직계 자손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고 발굴 보고자들은 보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형태의 장식적 의의는 비록 간략화된 표현이지만 시베리아의 샤머니즘이 그 밑바탕에 깔려있다고 하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금관과 금동관의 차이는 출신과 관계되어 금관이 출토된 부인의 신분이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결국 이 은관은 시베리아의 전통으로 이러한 관을 쓸 수 있는 신분의 남성은 북방민족과의 관련성을 암시하고 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왜 북분의 부인무덤에서는 순금제의 금관이 출토되고 남편의 무덤인 남분에서는 금동관만 다수 출토되었는지, 또 은관이 함께 출토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렇게 실용적인 관이 같은 시기의 다른 무덤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는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관 중앙 장식의 높이는 19.9cm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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