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미쳐간다. 딱히 이유를 알 수 없다. 다들 정신 줄을 놓고 게걸스레 피를 탐닉한다. 곁에 있는 동료조차 믿을 수 없다. 주인공들은 고립무원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죽도록 고생한다. '좀비영화'의 일반적인 이야기 규칙이다.
'크레이지'는 일종의 좀비영화다. 장르적 규칙을 충실히 따른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주체성을 잃고 흐느적거리며 피의 축제를 벌인다. 여느 좀비영화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이 영화, 특별하다.
배경은 미국의 한 소도시. 서로 비밀이 없을 정도로 인구는 많지 않다. 보안관의 할 일이라곤 라이벌 고등학교 야구팀간 경기의 경비를 보는 정도다. 한적하다 못해 고요하고 평화로운 도시는 순식간에 광기에 휩싸인다.
주민들은 하나 둘 활기를 잃은 표정으로 가족을 가둔 채 집에 불을 지르거나 이웃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모든 통신 수단이 끊기고 도시는 봉쇄된다. 중무장한 군인들은 광란에 빠진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한다. 마을의 상수원에 생화학 무기를 실은 군용기가 추락하면서 벌어진 아비규환이다. 보안관 데이빗(티모시 올리펀트)과 그의 아내 쥬디(라다 미첼)는 지옥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험하고 험한 행로를 거쳐 생존의 길을 찾아 나선다.
'크레이지'는 좀비의 창궐 뒤에 대단한 비밀이 감춰져 있는 양 이야기를 위장하며 반전을 노리진 않는다. 피가 스크린을 흥건히 적시며 위장을 불편하게 하지도 않는다. 투박하고 직선적이고 솔직하다. 정직하게 장르적 규칙에 충실하기에 오히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재미가 느껴진다. 드라마에 집중하기 보다 섬세하게 공포감을 조성하려 하는 것. 주인공들을 향한 좀비들의 공격이 서스펜스를 이어가고, 좀비를 제거해 가는 주인공들의 활약이 쾌감을 선사한다. 주택과 거리, 주유소, 병원 등 일상의 공간을 이용해 관객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영화다. 눅눅한 불쾌감을 던지기보다 솜털을 곤두세우게 하며, 기이한 서늘함을 전한다.
공포영화의 거장 조지 A. 로메로 감독이 만든 좀비영화의 고전 '분노의 대결투'(1973)를 새롭게 만들었다. 전작 못지않은 완성도를 보이는 리메이크작이라 할 수 있다. 감독은 브렉 아이즈너. 월트 디즈니의 전 회장으로 한때 할리우드와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쥐락펴락했던 마이클 아이즈너의 아들이다. 외계인과 관련된 세 가족의 이야기를 그려 화제를 모은 TV시리즈 '테이큰'(2002)과 액션 블록버스터 '사하라'(2005) 등을 연출했다. 8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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