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고향에 오면 숨길 게 없어져요. 시인도 마찬가지라, 그가 나고 자란 집과 마을을 찾으면 시집을 읽을 땐 생각지도 못했던 시인의 '알맹이' 같은 걸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디자인은 발로 해야 한다고 봐요."
시각디자이너 안상수(58ㆍ홍익대 미대 교수)씨는 5일 오전 손택수(40) 시인과 함께 손씨의 고향인 전남 담양군 강쟁마을로 향하는 기차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달 말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될 손씨의 세 번째 시집 <나무의 수사학> 의 디자인 작업을 위한 여정이었다. 나무의>
안씨는 실천문학사의 시집선 디자인을 맡아 지난해 2월 시집선 180번째인 이덕규 시인의 시집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신작 시집과 이전 시집들의 개정판을 새 판형으로 꾸미고 있다. 지금까지 그의 손을 거쳐 나온 시집은 모두 6권. 제목이 세로로 쓰여진 단색 표지, 옛 활자본을 떠올리게 하는 본문 글자체 등이 일급 디자이너인 그의 역량을 여실히 보여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 권의 시집 디자인을 위해 들이는 안씨의 정성이다. 해당 시인의 예전 시집들을 전부 독파하는 것은 기본이고, 시인과 함께 그의 고향을 찾아 시집울 꾸미는 데 필요한 재료를 찾는다. 예컨대 김일영 시인이 태어난 전남 완도군 생일도를 찾았을 땐 저물녘 섬 주위에 깔린 동백꽃 빛깔의 노을을 보고 시집 표지색을 선택했다. 정우영 시집 <살구꽃 그림자> 의 속지 무늬는 정씨의 전북 임실 생가의 부엌 벽에서 발견한 그을음 사진으로 꾸몄다. 정우영씨는 "그을음처럼 켜켜이 쌓이는 그리운 것들에 끌리는 요즘의 내 시심을 정확히 포착한 디자인"이라며 감탄했다. 살구꽃>
독일에 사는 허수경 시인의 첫 시집 개정판을 위해 안씨는 스위스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고 있는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허씨를 찾아가 인터뷰하도록 했다. "직접 독일에 가려다가 과공(過功)이다 싶어"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대신 그는 허수경 시인이 나고 자라 대학까지 마친 경남 진주, 사천 지역을 곧 찾아갈 작정이다.
기차간에서 안씨는 손택수 시인의 고향인 강쟁마을의 위치를 확인한다며 불쑥 옛 지도를 꺼냈다. 대동여지도였다. "산과 강의 지세를 파악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지도는 없다. 요즘 지도는 정보는 많지만 정작 자연을 파악하기 힘들다." 강쟁마을은 영산강 지류인 죽녹천에 인접한 곳이었다. 어릴 적 늘상 이 개천에서 헤엄치며 놀았던 일부터 손 시인은 기억의 꾸러미를 풀었다. 그는 개천에서 두 번 익사할 뻔했다고 했다. "물귀신이 네 머리카락을 끌고 갔던 것"이라던 어머니의 말은 어린 그에게 신화적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손씨는 "두 번이나 나를 물 속에서 끌어내줬던 마을 아저씨가 며칠 전 꿈에 나왔다"고 했다.
담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조선시대 제방인 관방제에서부터 영산강 지류를 거슬러 강쟁마을로 이동했다. 죽제품을 팔러 나온 마을 할머니들이 쉬는 참에 구수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관방제 죽물시장, 옛 사진 속 총각이던 아버지가 기대서 기타를 치던 마을 어귀의 팽나무, 우물과 장독대가 있는 혼자만의 놀이터였던 뒤란 등 손씨의 추억이 깃든 현장을 찾아다니며 안씨는 팽나무 줄기, 대나무 울타리, 장독 무늬 등 시집에 쓸 이미지를 얻기 위해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흙, 나무껍질 등을 채집하고, 손씨의 친척들과 담소도 나눴다.
손씨의 생가 터엔 이미 다른 집이 지어졌지만, 혼자 있기 좋아하던 어린 시절 그의 놀이터였던 뒤란만큼은 우물이 메워졌을 뿐 크게 변한 게 없었다. 손씨가 말을 꺼냈다. "내가 다섯 살 때 가족들이 부산으로 이사했다. 슬레이트 지붕 하나 밑에 30가구가 살던 산동네였다. '이런 데선 하루도 못산다'고 생떼를 피우며 혼자 귀향했다가 열 살 때 부산으로 되돌아갔다. 이모, 삼촌들에게 업혀 땅에 발을 댈 일 없던 고향에서 아무도 등을 주지 않는 비정한 근대 도시로의 이사, 그렇게 삶의 공간이 찢어지며 입은 상처가 나를 문학으로 이끈 것 같다."
뒤란에서 묵묵히 손씨의 말을 듣고 있던 안씨가 그를 처마 밑 담벼락에 불러 세웠다. 흰 칠이 돼있던 벽엔 오랜 시간 흘러내린 빗물을 따라 길게 칠이 벗겨져 있었다. 안씨가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쓰라린 흉터 같은 시멘트 맨살 옆에 손씨는 서 있었다. 디자이너와 시인은 이심전심을 이룬 듯했다.
담양= 글·사진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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