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묶은 KTX 고속열차가 개통한 지 이 달로 6년이 된다. 2004년 4월, KTX 개통에 맞춰 서울역 신역사가 문을 열었다. 철골과 유리로 지어진 이 거대한 건물이 생기면서 르네상스 양식의 붉은벽돌 2층 건물인 서울역 구역사는 문을 닫았다.
사적 284호로 지정된 이 건물이 지어진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식민지 조선의 관문이었던 구 서울역사는 철도로 대표되는 근대문명의 상징이자 일제 침탈의 교두보로서 두 얼굴을 지닌 역사의 현장이다.
일제강점기 서울역은 '경성역'으로 불렸다. 한국 철도 1호인 노량진_인천 간 경인철도 개통 이듬해인 1890년 7월, 한강철교 준공으로 서대문까지 철로가 연장되면서 지금의 서울역과 염천교 사이에 허름한 목조건물로 문을 연 남대문역이 그 전신이다.
3ㆍ1운동 여섯 달 뒤인 1919년 9월 2일, 강우규(1855~1920) 의사가 조선 3대 총독으로 오는 사이토 마코토를 향해 폭탄을 던진 의거 현장이기도 하다. 남대문역은 1923년부터 신축 경성역이 완공되기 전까지 2년 동안 경성역으로 불렸다.
철도는 조선인들에게 놀라운 신 문물이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독립신문에 실린 시승기는 "화륜거(열차) 소리는 우레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빠르기는)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고 묘사했다.
춘원 이광수는 철도 굉음에서 근대의 소리를 들었다. 그의 소설 '무정'에서 주인공 형식은 남대문역에 내려 소란하고 분주한 광경을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실로 현대의 문명은 소리의 문명이다.
서울은 아직 소리가 부족하다. 종로나 남대문통에 서서 서로 말소리가 아니 들리리만큼 문명의 소리가 요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쌍하다. 서울 장안에 사는 삼심여만 흰옷 입은 사람들은 이 소리의 뜻을 모른다."
과연 조선인은 불쌍했다. 그러나 이광수가 말한 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일제의 수탈이 조선을 짓밟았기 때문이다. 철도는 일제 식민통치의 근간이었다. 일제는 조선 강제병합 이전에 이미 경인ㆍ경부ㆍ경의선을 건설해 직접 장악했다. 철로를 따라 조선인의 피와 눈물이 흘렀다.
철도 건설에 땅을 뺏기고 공사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살인적 중노동에 시달렸다. "경부ㆍ경의철도 통과 지역에는 온전한 땅이 없고 기력이 남아있는 사람이 없고 열 집에 아홉 집은 텅 비었고 천릿길에 닭과 돼지가 멸종했다"는 신문 기사가 남아 있다. "양귀는 화륜선 타고 오고 왜귀는 철도 타고 몰려든다"는 동요도 유행했다.
경성역은 식민지 조선 철도의 중심으로서 많은 사건을 지켜봤다. 1926년 신문 기사는 역전 떡 노점상이 일본 순사에 죽도록 맞아 앉은뱅이가 된 일, 경성역의 조선인 말단직원이 일본인의 위세를 믿고 대합실에서 조선 부인에게 횡포를 부리다가 지탄받은 일 등을 전하고 있다.
영친왕과 덕혜옹주 등 조선 황실 가족의 강제 일본행, 김활란 박인덕 홍난파 최승희 등 근대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유학과 귀국, 일제 총독과 고위 관리들의 부임과 이임 등이 경성역에서 이뤄졌다.
철도는 쌀, 석탄, 철광석 등 조선의 식량과 자원을 국외로 뺏아가는 흡혈귀였다. 일본은 자국의 식량 부족을 조선의 쌀로 해결했다. 전체 화물 중 일본으로 반출되는 쌀 물량은 1910년대 후반 14%에서 1930~34년 무려 46%로 늘었다.
일제의 수탈이 그악해질수록 조선인은 살 길을 잃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후반 경성역에서 가장 흔한 풍경은 만주로 이민 가는 가난한 이들의 행렬이었다.
살 길이 없어서, 또 대륙 침략을 본격화한 일제의 권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갔다. 만주행 이민 승객이 매일 평균 수백명씩 됐다. "푹푹 칙칙 푹푹 칙칙 뛰이- 떠난다, 타관천리 안개 서린 벌판을. 정은 들고 못 살 바엔, 아아, 이별이 좋다… 찾아가는 그 세상은 나도 나도 모른다"는, 1938년 나온 유행가 '울리는 만주선'은 막막한 유민의 설움을 보여준다.
배고픈 식민지 조선에서 경성역은 한편으로는 멋쟁이 모던보이, 모던걸이 드나들며 근대와 낭만을 즐기는 별천지이기도 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와 스팀까지 갖춰 최신식으로 지어진 경성역 대합실 빠에서 '삐루'(맥주)를 마시고, 커피향 그윽한 티룸에서 대화를 나눴다. 특히 조선 최초의 양식당인 2층의 그릴은 명사들의 사교장으로 유명했다. 은그릇과 은촛대를 쓰고 달팽이요리 등 최고급 요리를 선보였던 이 곳은 총독부 관리와 부호들이 애용했다.
1920년대에는 철도 여행이 널리 퍼지면서 경성역은 봄과 가을 행락철이면 북새통을 이뤘다. 인천 월미도, 온양온천과 부산의 동래온천, 금강산 등이 주 목적지였다. 1930년대에는 일제가 놀이터로 만들어버린 창경원 벚꽃 구경을 하려고 전국에서 올라와 경성역에 내리는 손님이 하루 4,000여명에 이르렀고, 겨울에는 스키열차까지 운행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고국을 떠나는 만주행 이민자들의 초라한 행색을 이들 행락객들의 즐거운 흥분과 대비해 상상해보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현재 서울역은 수도권 지하철 1, 4호선과 경의선, KTX가 서는 곳으로 매일 승객이 붐빈다. 서울역 지하철 승객은 하루 17만명, KTX 이용객은 매일 평균 5만명이 넘는다. 12월 인천공항철도, 2016년 광역급행열차(GTX)가 연결되면 서울의 관문으로서 더 큰 몫을 하게 될 터이다.
구 서울역사, 경성역의 기억은 한국 근현대사의 장으로 남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을 드나든 사람과 물자의 애환뿐 아니라 해방 당일 서울역 광장을 가득 메웠던 환희에 겨운 만세 인파, 1980년 서울의 봄, 1987년 6ㆍ10민주항쟁 등 이곳에서 일어났던 뜻깊은 사건들을 미래로 수렴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오미환 기자 mhoh@hk.co.kr
■ 구 서울역사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 중
구 서울역사는 현재 공사 중이다. 1925년 신축 당시의 원형을 되살려 복합문화공간으로 쓰기 위해서다. 내년 3월 완공이 목표다.
지상 2층, 지하 1층의 르네상스 양식 붉은벽돌 건물로 지어진 구 서울역사는 85년 전 신축 당시 1층은 대합실, 2층은 귀빈실과 이발소, 그릴이 있었고 지하는 사무실로 쓰였다. 복원 공사를 마치고 다시 문을 열면 1층 중앙홀은 공연ㆍ전시ㆍ이벤트 등의 다목적 공간으로, 대합실은 상설 공연장과 서울역의 근현대사를 보여주는 역사관으로 탈바꿈한다.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양식당으로 유명했던 2층 그릴은 공연ㆍ전시ㆍ세미나ㆍ회의 등을 위한 다목적 홀로, 2층의 나머지 공간은 기획전시실로 쓰일 예정이다.
구 서울역사는 2004년 KTX 고속철도 개통에 맞춰 신 역사가 준공된 이후 역사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2007년 문화체육관광부가 관리를 맡은 이후 학술회의, 패션쇼, 전시회, 음악회 등에 쓰이기도 했다. 사적 284호로 지정된 이 건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를 두고 미술관, 역사관, 공연장 등 여러 의견이 나온 끝에 복합문화공간으로 결론을 내렸다.
지난해 7월 말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하면서 가림막을 쳐놔서 밖에서는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가림막에 이 건물의 내력을 보여주는 사진을 전시해 오가는 행인의 눈길을 붙잡고 있다.
건물 내부는 여기저기 널린 자재와 빽빽하게 설치된 비계들로 어수선하다. 덧댄 벽을 걷어내고, 덧칠한 페인트를 벗겨내고, 낡은 창틀을 뜯어내는 등 새 단장 준비가 한창이다.
시공회사인 삼부토건의 유홍길 현장소장은 "신축 당시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가 많지 않아 복원에 어려움이 있지만, 벽면 타일을 옛날 사진에 나온 모양 그대로 주문 제작하는 등 원형을 최대한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미환기자
■ "일제, 수탈 위해 철도 독점… 철도정책이 곧 침략정책"
일제가 한반도에 철도를 부설한 목적은 군사적으로 한국과 만주 등 대륙을 침략하고, 경제적으로 이 지역의 부원(富源)을 개발하여 수탈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일제가 한반도에 철도를 부설하면서 내세운 '국방공위 경제공통(國防共衛 經濟共通)'이라는 슬로건에 잘 요약되어 있다.
군사와 경제 중 어느 쪽이 우선인가는 시대 상황에 따라 달랐다. 러일전쟁(1904~05)과 중일전쟁(1937~45) 중에는 당연히 군사적 역할이 강했지만, 자동차 교통이 거의 발달하지 않았던 일제시대 전반에 걸쳐 철도는 군사와 경제의 양 면에서 여객과 화물 수송의 대부분을 담당했다.
철도의 역할이 이처럼 지대했으므로, 일제는 한반도의 철도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무력과 자본, 기술 등 온갖 수단을 구사했다. 따라서 일제의 한국철도정책은 곧 한국침략정책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일제는 먼저 한국의 철도를 독차지하기 위해 한국인의 철도 부설을 탄압했다.
그리하여 일제시대에 한국인이 주체가 되어 건설한 철도는 한 뼘도 없었다. 또 철도를 값싸고 신속하게 부설하기 위해 한국인의 토지와 노동력을 무상 또는 헐값으로 수탈했다. 철도 선로와 정차장 등의 건설에는 방대한 토지가 필요했는데, 국유지는 무상으로, 민유지는 헐값으로 수용했다.
또 철도와 관련 시설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은 부역이나 징발 등으로 동원했다. 전쟁 중에는 이러한 불법과 강압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한국인은 당연히 일제의 무리한 철도 부설에 강력히 저항했다. 대한제국 정부 또는 지주와 관료는 자본과 기술을 모아 스스로 철도를 건설하려는 운동을 벌였다. 철도 연선의 농민과 주민은 토지와 노동력의 수탈에 맞서 민란을 일으키고, 정차장을 습격하거나 열차를 공격하는 등 반철도운동을 전개했다.
시흥과 곡산 등지에서는 일본인 수 명이 살해당하고, 황간과 이원 등에서는 정차장이 불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제는 한국인의 반철도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러일전쟁 중에는 한국인의 철도 공격을 군율로 다스렸다. 그리하여 철도 연선은 계엄 아래 들어가고 철도를 공격한 한국인 40여 명이 사형을 당하는 비운에 처했다. 철도는 군사시설과 똑같았기 때문에 일제는 중일전쟁 때도 철도에 대해 특별경호를 펼쳤다.
철도는 한국인에게 문명을 맛보게 한 이기(利器)의 측면도 있었지만, 억압과 수탈의 고통을 안겨준 흉기와 같은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철도를 보면 빼앗긴 문전옥답이나 공사장에서 숨져간 남편이 떠올랐다.
그리고 열차 소리를 들으면 징용이나 정신대로 끌려간 아들 딸이 생각났고, 쌀가마와 놋그릇을 빼앗아간 공출을 연상했다. 스스로 근대화를 이룩하지 못하고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한 한국인은 철도를 매개로 하여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근대를 학습하며 문명의 쓴맛을 톡톡히 체험한 셈이었다.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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