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만난 김윤진은 "여자배우로서 속상하다"고 했다. "여자들이 이끄는 '여자영화'는 잘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여자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하모니'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도 '여자영화'가 흥행에서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됐다"고 밝혔다. "재능이 많은, 보물 같은 후배들이 좀 더 많이 설 수 있는 무대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김윤진의 희망과 달리 요즘 여자배우들, 참 지독한 '춘궁기'를 겪고 있다. 일할 의욕은 넘쳐나나 일거리는 드물기만 하다. 여자배우들이 일자리를 못 찾는 반면 남자배우 품귀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차고 넘쳐나는 전쟁영화로 '차출'되고, 스릴러에 고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을 빼면 A급 스타들이라고 크게 다를 바 없다. 배역의 격과 개런티를 낮추면 백수 신세는 면할 수도 있으련만, 쉬 그러지도 못한다. 한번 주저앉으면 언제 올라갈지 모르는 연예계의 생리를 무시할 수 없어서다. 30대 중반 이후 인기와 개런티가 급격히 추락하는 여자배우의 짧은 전성기를 생각할 때 젊은 스타들이 자존심 버리고 아무 배역이나 덥석 맡기도 쉽지 않다.
여자배우들의 '대량 실업'은 "'여자영화'는 안 된다"는 맹신이 부른 결과다. "남자배우들이 기본적으로 여자배우보다 훨씬 더 마케팅에 유리하고 티켓파워도 있다"고 영화인들은 말한다. '남자영화'가 '여자영화'보다 흥행 가능성이 많고, 손해 볼 위험은 적다는 것이다. 남자배우를 앞세운 블록버스터는 있어도 여자배우가 주연인 대작이 드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충무로 돈줄이 마른 요즘, 제작자들은 손해 볼 확률이 낮은 '남자영화'만 편애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 현실이 상식과 예측대로만 돌아가나. 올해 1ㆍ4분기만 따지면 '여자영화'가 '남자영화'보다 쏠쏠한 재미를 봤다. '하모니'는 303만 관객이 봐 올해 개봉 영화론 '의형제'의 뒤를 이은 흥행성과를 올렸고, '육혈포강도단'은 지난 주말 90만 관객에 달하며 손익분기점에 다가섰다. '남자영화'의 흥행성적은 비교하기조차 민망하다. '의형제'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흥행전선에서 참패하며 적자를 면치 못했다. 잘 만든 '여자영화' 한 편이 안일한 '남자영화' 열 편 부럽지 않은 상황이다.
영화는 전형적인 '고위험 고수익'제품이다. 모험을 걸수록 더 큰 기회가 열리기 마련이다. '여자영화'의 최근 선전은 관객이 충무로에 보내는 일종의 경고장이다. 엇비슷한 소재와 장르 뒤로 숨지 말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야성을 되찾으라는…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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