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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29> 이집과 최원도의 각별한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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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29> 이집과 최원도의 각별한 우정

입력
2010.04.09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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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은 의리(義理)를 중시한다. 오늘은 여기에 조선초기 이집과 최원도의 각별한 우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집과 최원도는 진사시 동년(同年ㆍ동기생)이다. 이집은 광주이씨의 중시조로서 원명은 이원령(李元齡)이었다. 그는 강직한 선비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 1368년(공민왕 17)에 그는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권승(權僧) 신돈(辛旽)을 공격하고, 또 한 동리에 사는 신돈의 문객(門客) 채판서(蔡判書) 앞에서 신돈을 공개적으로 비판해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원령은 아버지를 업고 경상도 영천(永川)에 사는 최원도(崔元道)의 집으로 갔다. 최원도라면 자기를 숨겨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원도의 집에서는 마침 작은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원령은 잠깐 행낭채에 들어가 쉬고 있었다. 그런데 최원도가 나와 “이 자가 재앙을 싣고 와서 내게 넘기려 한다”고 노발대발하면서 쫓아내고 행랑채에 불을 질러버렸다. 하는 수 없이 이원령은 그 집에서 5리쯤 떨어진 숲 속에 숨어서 쉬고 있었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이윽고 밤이 되자 최원도가 나타나 그들을 데리고 집으로 와서 4년 동안 낮에는 다락에, 밤에는 골방에 숨어서 살게 했다.

그리고 최원도는 미친 척 했다. 한 끼에 밥을 3인분씩이나 먹고, 대소변을 방 안에서 보는 등 이상한 짓을 했다. 그러나 비밀을 지키기가 어려웠다. 우선 부인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제비라는 계집종을 시켜 엿보게 했다. 그랬더니 수상한 사람들이 다락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최원도는 부인은 설득했지만 제비가 걸렸다. 이를 눈치 챈 제비는 19살의 꽃다운 나이에 자결하고 말았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신돈은 영천관아에 관문(關文)을 보내 빨리 범인을 잡아 올리라 했다. 그러나 고을에서는 최원도가 이원령을 쫓아낸 명백한 사실을 고해 무사했다. 최원도는 이원령의 아버지를 친부모처럼 봉양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가 죽자 친상처럼 장사를 치르고 어머니 묘소가 있는 고을 남쪽 나현(蘿峴)에 제비와 함께 위 아래로 묻어 주었다.

이원령은 1371년(공민왕 20) 6월에 신돈이 복주(伏誅)되자 개경 현화리(玄化里)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죽었다가 살아왔으니 이름과 자·호를 바꾸고자 했다.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집의(集義)에서 생긴다”(<孟子> 公孫丑章)는 구절을 따 이름을 “集”, 자를 “浩然”으로 바꾸고, 숨어 산 괴로움을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호를 “遁村(둔촌)”이라 했다.

벼슬은 판전교시사(判典敎寺事)까지 지냈다. 그러나 현세에 뜻이 없어 여주(驪州) 천령현(川寧縣) 강가에 은거하다가 1387년(우왕 13)에 죽었다.

최원도는 이집과의 우의(友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제비는 주인을 위해 19살의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버렸다. 얼마나 갸륵한 의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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