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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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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해산

입력
2010.04.09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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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산속 임자 없는 밤나무들

다 익어 영근 밤알 연달아 토해놓느라

날 새는 줄 모른다 도토리나무도

덩달아 바빠져서 바람을 핑계로

몸 흔들어댄다 아람 벌어져 떨어지는

열매들 이마 때릴 때마다 끙, 하고

산은 돌아눕는다 설핏 잠에서 깬 다람쥐

두리번거리다 곧 귀를 열어젖혀

토독토독 열매를 세다 다시 잠든다

저 멀리 인간의 마을은 불 꺼진 지 오래

신혼방 엿보고 오는 길인지

얼굴 불콰한 달빛

숨가쁜 소리로 환한 숲속

나무들 몰래 일어나 바심하느라 여념이 없다

내일 다산(多産) 마친 나무들 눈빛 더욱 맑고

몰라보게 몸은 수척해 있으리라

● 아무도 모르는 깊은 숲속에서 오래된 고목이 쓰러지면 누가 있어 그 소리를 들어주는가? 그런 오래된 질문이 있었습니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면 고목이 쓰러진 사건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죠. 정답은 시인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꼭 시를 발표하고 시집을 출간해야만 시인인가요? 늦은 밤, 임자 없는 밤나무가 영근 밤알을 연달아 토해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시인이지요. 다들 곯아떨어졌는데, 잠도 안 자고 숲속을 헤매는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시인이에요. 혹시 들어주지 못한 소리가 있을까봐. 세상에, 오지랖 오지랖 말들 하지만, 시인의 오지랖만할까요. 하지만 덕분에 우리가 이 정도나마 사람답게 살게 됐다고 말하면 또 어떨까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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