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꼬리무는 러 테러의 근본원인은
분리독립 추진과 이에 대한 억압. 체첸, 잉구세티아 등 북 카프카스 지역 자치 공화국과 러시아 사이의 갈등을 간략히 압축한 표현이다. 독립을 원하는 민족(혹은 국가)과 그에 대한 탄압은 짧게는 십수년 계속됐고 앞으로도 이어질 이 지역 갈등의 뿌리다. 하지만 탄압의 근저에는 석유에 대한 러시아의 탐욕이 있고 테러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 일변도가 '피의 악순환'을 불렀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북 카프카스와 러시아의 역사적 악연
체첸, 잉구세티아 등 북 카프카스 지역과 러시아의 악연은 19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 팽창정책의 처음 공격 대상이 바로 이 지역이었다. 일방적 침공으로 이슬람교가 주된 종교인 이 지역은 러시아에 편입됐다. 20세기 초 이슬람 중심의 해방운동은 소련군에 의해 좌절됐다. 스탈린은 1930년대 초 이 지역 지식인과 독립세력 10만여명을 처형하거나 강제 이주시켰고, 2차 대전 때도 인구 50만명을 고향을 떠나 시베리아 등지로 옮기도록 강요했다.
이후 소련의 일당독재와 냉전 이데올로기로 인해 잠복했던 이 지역 분리독립운동은 1991년 소련 해체와 맞물려 다시 일어났다. 그러나 체첸에선 내부 친러 세력이 러시아와 결탁, 러시아 군대를 맞아 전쟁을 치러야 했다. 1994년과 1999년 1ㆍ2차 체첸사태(전쟁)가 그것. 이로 인해 독립은 고사하고 러시아의 지배가 더욱 견고해진 결과를 낳았다. 이후 다게스탄 등 산악지대로 흘러 들어간 이 지역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은 모스크바 등에서의 자살폭탄테러로 러시아를 괴롭히고 있다.
테러의 씨앗, 러시아의 석유 야욕
러시아가 북 카프카스 지역에 유독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달 모스크바 지하철 연쇄폭탄테러가 발생한 직후 오일프라이스닷컴은 "폭탄테러의 근본은 석유"라고 보도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돼 15개 공화국으로 분리될 때도 이 지역만이 논의 대상에서 제외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2007년 미 에너지정보국의 발표에 따르면 2015년께 카스피안 해 지역 석유 생산량은 하루 430만배럴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추정 매장량만도 최대 490억배럴로 중동국가에 못지 않다. 오일프라이스닷컴은 "1999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을 총리로 임명한 후 그에게 처음 맡긴 역할은 체첸 지역을 통과하는 석유관 건설"이라고 보도했다. 원유 생산과 수송의 요충지로서 러시아가 이 지역 자치 공화국들의 독립을 허용할 리 없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2008년 러시아가 그루지야 전쟁 때 인정사정 보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본다.
피의 보복보다는 경제지원이 필요
최근 잇따른 자살폭탄 테러 이후 러시아 정부는 "테러 배후를 색출해 멸살하겠다"며 예의 강경 보복을 천명했다. 테러와 러시아 정부의 보복이란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러시아가 강경 정책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푸틴 총리가 정권을 잡은 이후 지속적 강경책이 테러를 양산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2차 체첸사태 이후 지하철 자폭테러만도 5번이 넘었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이 지역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 테러를 근절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러시아 전체 실업률이 8%대인 반면, 체첸의 실업률은 80%에 이를 정도의 경제 불균형도 중앙 정부에 반발하는 요인이라는 것.
모스크바 카네기 재단의 안보전문가인 니콜라이 페트로프는 영국일간 텔레그래프에 "크레믈린이 완력에만 의존한다면 공격과 보복의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그래픽=성시환기자 seewhan@hk.co.kr
■ 체첸반군, 지도자 잃을 때마다 되레 더 강해져
러시아에 맞선 역대 체첸 지도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러시아군에게 목숨을 잃게 되지만, 그들의 비극적 죽음이 오히려 체첸 반군세력을 더욱 강화시킨다는 점이다.
미국 외교전문지 폴린폴리시(FP) 최신호는 이 같은 역설적 현상 때문에"러시아에서 테러가 바이러스처럼 퍼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대통령 재직 시절부터 "반군의 최후 한 명까지 사살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2006년 7월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이 강경파 체첸 지도자 샤밀 바사예프를 '제거'한 이후 체첸 반군의 테러공격이 주춤해지자 푸틴의 강경노선은 성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이 기간 체첸 반군은 인터넷을 통해 비극적 최후를 맞은 이들을 순교자로 선전하면서 영향력을 국경 너머로 확장했다고 FP는 보도했다.
지난달 말 모스크바 지하철 테러를 주도해 세계적 주목을 받게 된 도쿠 우마로프가 대표적이다. 그는 러시아의 표적이 되기 쉬운 '조직'보다 무형의'브랜드'를 키워 러시아를 위협하고 있다.
모스크바 카네기재단의 북카프카스 전문가인 알렉세이 마라쉔코는 "우마로프가 이끄는 '카프카스키 에미리트(카프카스 이슬람왕국)'는 본부도 없고, 군대도 없고, 전선(前線)도 찾기 힘든 '버추얼 조직'"이라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밝혔다. 핍박 받는 무슬림 형제를 구출하겠다며 국경을 넘어 몰려드는 무슬림 청년들을 결집할 수 있는 위성 전화와 인터넷만으로 우마로프는 러시아에 가장 위험한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다.
조직보다 브랜드가 힘을 발휘하면서, 러시아군이 체첸 지도자를 '제거'할 때마다 순교자 이미지의 확산으로 체첸 반군은 더욱 강해진다. FP는 지난달 2일 잉구시의 한 시골에서 러시아 특수부대의 공격에 의해 사망한 유명 설교자'부리야트스키(28)'를 애도하는 메시지가 체첸 인근의 아제르바이잔,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을 넘어 터키, 독일까지 전세계에서 쇄도하면서 그는'전설적 순교자'로 추앙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베리아 태생으로 본명 알렉산더 티코미로프인 부리야트스키는 생전에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교양 있는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구소련권 무슬림 국가의 도시 청년들을 반 러시아 혁명전선으로 불러 모았다.
푸틴 총리가 압도적 화력에 매달려 있는 동안 체첸 반군은 뉴미디어를 활용한 최첨단 조직으로 진화한 것이다.
정영오기자 young5@hk.co.kr
■ 체첸 반군 - 알 카에다 10여년 전부터 '연계'
검은 부르카로 얼굴을 가린 여성 테러리스트의 자폭, 비디오 영상 공개, 1차 테러 후 다시 경찰을 겨냥한 2차 테러….
체첸 반군의 잇따른 자살 폭탄테러가 여러모로 알 카에다의 수법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러시아에 '알 카에다 경보'가 울려 퍼졌다.
지하철 테러를 일으킨 체첸 최대 반군 '카프카스 에미리트'의 지도자 다쿠 우마로프는 테러 후 자신들의 사이트에 러시아를 비판하는 영상을 올렸다. 그의 연설은 미국을 비난하는 오사마 빈 라덴을 연상케 했다.
전문가들은 1차로 폭탄을 터뜨린 후 조사를 위해 경찰이 도착하자, 다시 2차 테러를 가한 지난달 31일 다게스탄 연쇄 테러도 전형적인 알 카에다식 테러라고 지적한다. 카프카스의 또 다른 자치공화국 잉구세티아에서 5일 4명의 사상자를 낸 폭탄테러도 같은 수법이다. 이날 테러범은 경찰서 정문에서 신분증 제시를 요구 받자 몸에 두르고 있던 폭탄을 터뜨렸고, 직후 인근 주차된 차량에서 두 번째 폭탄이 터졌다.
체첸 테러와 알카에다 및 아프가니스탄 텔레반과의 연계 가능성은 지난달 29일의 모스크바 지하철 연쇄 테러사건 이전부터 러시아 치안당국의 주된 관심사였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지하철 테러사건 직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국경에서 활동하는 민병대원들이 폭탄 테러를 도왔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1990년대 나와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 재임기간 파키스탄 정보부(ISI)는 체첸 반군 등 이슬람 반정부 민병대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훈련을 시켜온 것으로 알려졌다. ISI는 파키스탄 종교단체 타블리그 자마트(TJ)를 통해 외국 이슬람전사를 모집해 양성하는데, 이 단체는 체첸이나 다게스탄뿐 아니라 중국 신장지구 등지에서도 이슬람 인재를 데려와 훈련시킨다는 것이다.
이미 여러 차례 체첸,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수단에서 온 외국인들이 탈레반과 섞여서 훈련을 받고 있다는 진술이 나오기도 했다. TJ는 빈 라덴과도 끈끈한 관계로 알려져 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파키스탄의 한 고위 장교는 "탈레반 정권이 1998년부터 체첸 반군들과 접촉해왔다"며 빈 라덴이 아프간을 떠난다면 체첸에 은신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채지은 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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