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배우 나문희씨의 팬이다. 눈이 부실 정도의 미모나 청춘이 부러워서는 분명 아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빛을 보지 못하던 때에도 한결같이 노력한 결과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마침내 이뤄낸 성공에 대해 당당히 자랑스러워 하는 자신감 때문이다. 어렸을 적에는 전혜린이나 기형도처럼 짧지만 열정적 인생을 산 사람들이 좋아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돋보이지도 않는데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주어진 일을 말없이 열심히 하는 사람이 좋다. 그리고 그렇게 나이가 들면서 점점 무르익어 마침내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눈물 날 정도로 존경스럽다. 나문희씨는 딱 그런 분이고 나도 나문희씨같은 과학자가 되기를 바란다.
유학 시절 이론물리를 공부하던 후배의 고민을 들어주다 밤을 샌 일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이론물리는 탁월한 소수만이 필요한 듯 했다.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 같지 않았고 그래서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들도 자신의 위치를 찾느라 고민하는 듯 했다. 그에 비해 내가 하는 실험세포생물학에서는 어느 정도 재능이 있고 인내심도 있는 사람이라면 세포생물학의 역사에 벽돌 하나쯤은 얹어 놓을 수 있다. 다만, 빼서는 안 될 벽돌 하나를 얹으려면 워낙 오랜 세월의 성공과 좌절을 반복하게 되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나이 들면서 점점 더 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신약개발은 생물, 화학, 의학, 공학 등 수없이 많은 노력들이 모여 하모니를 이룰 때 성공한다. 특허 논쟁을 피하려면 가장 기초적인 원리 발견을 전제로 하는 건 물론이다. 따라서 전체를 지휘할 지휘자는 각 분야의 중요성을 잘 알고 기초학문에 대한 소신이 있어야 하며 흔들리지 않는 뚝심도 갖춰야 한다.
바이오 신약사업이 차세대 성장 동력인 건 분명하다. 위장약 잔탁, 발기부전치료제 비아그라, 표적항암제 글리벡 등이 어떻게 세계 제약업계의 판도를 바꿨는지 그 신화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제대로 된 신약 하나 개발하면 무명의 제약회사도 일약 세계 일급의 제약회사로 발돋움한다.
우리 정부도 바이오 신약개발의 꿈을 꾸고 있다. 그런데, 간혹 납득하기 힘든 정책을 편다. 신약개발의 인력을 양성하겠다고 약학대학의 신설을 과도하게 허가한 것이 대표적이다. 약대가 있어야 신약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게 겉으로 내세운 논리인데 실상 선진국에서 약대의 비중은 우리나라보다 월등히 낮고 실제 신약개발을 담당한 사람들 중 약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다. 생물학자와 화학자들이었다. 최근 대학들이 약대를 신설하고자 노력한 진짜 이유는 벌어들일 돈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자격증을 중요시하는 풍토에 따라 인기 학과에 안정적으로 들어올 등록금과 약대의 교수들이 끌어들일 보건복지부의 막대한 연구비가 대학의 살림을 풍요롭게 하리라고 계산했을 것이다 (사실이 아니라면 양해를 구한다). 원칙없는 자본의 논리에 정부가 흔들린 게 아닐까 걱정되는 대목이다.
꿈의 신약은 하늘에서 주는 선물과 같은 거라고 누군가 말했다. 과학에서 우리는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젊은 나라일 뿐이다. 쉽게 지치지 않으려면 숨을 고르고 길게 가는 게 필요하다. 나문희씨가 아름다운 이유는 오랜 노력 끝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는 고희(古稀)가 되어서야 견고한 위치를 얻었다.
기왕에 약대들이 신설되었으니 이 새로운 동력이 약사자격증을 양산하기보다는 바이오 산업 발전의 초석을 다지는 인력양성의 기회로 삼기를 바란다. 하지만 약대 신설 때문에 기초과학을 위협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오히려 생물과 화학 등 과학을 공부할 약대 졸업생들 중에서 훌륭한 과학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원리를 깨달으려는 기초가 튼튼해야 응용도 제대로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현숙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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